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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디머교회 역사

Center Church 리디머교회 역사
리디머교회 성장역사

리디머교회 성장역사

당시 PCA (the Presbyterian Church in America)의 교회개척부서인 MNA (Mission to North American) 책임자이던 테리 가이저가 필라델피아 차이나타운에 있는 한 음식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그는 맨해튼에서 교회를 개척해 볼 것을 나에게 제안했다. 테리는 도시선교의 일종인 “outside-in” 모델이 가진 한계들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했다. “outside-in” 모델이란, 궁극적으로 다운타운 지역을 선교하기 위해 교외에 교회들을 개척하는 것을 말한다. 대신에 그는 “inside-out” 전략을 제안했는데, 이러한 전략을 따를 경우, 도심의 강력한 교회가 새로운 교회 개척을 위해 대도시 권역 전체에 흩어진 지역들과 사람들에게로 뻗어나갈 기회를 제공하게 된다.

이러한 전망에 대해 이미 또 다른 목사에게 제안했다가 거절당한 참이었다. 그는 그 일을 맡을 적임자가 나라고 생각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솔직히 그가 말한 이유 중 한 가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좀 놀라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마음이 동하고 도전도 받았다. 케시에게 가서 “그 제의에 대해 10퍼센트 정도 마음이 열려 있어.”라고 말하자, 케시는 “어째서 그렇게나 많이 열려 있는 거죠?”하고 되받아쳤다. 결국 제안은 거절했지만, MNA의 파트타임 간사로 있었고, 필라델피아에 거주하고 있던 터라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강의했다), 교회 개척과 관련하여 뉴욕을 조사하는데 동의했다.

나는 가까이 신뢰하는 동역자들 (뉴 라이프 장로교회의 론 루츠와 클레어 데이비스)을 찾아가서, 뉴욕에 교회를 개척해야할지 모른다는 막중한 사명감이 내 내면 깊은 곳에 당혹감을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을 나누었다.

이야기하는 도중에 나는 내 기도생활과 영적 생활이 현재 그런 중대한 프로젝트를 감당할 만큼의 능력이 안 된다는 것을 바로 깨달았다. 말 그대로 “축 늘어져 있는” 내 모습을 직시하게 되었다. 나는 회개했고 영적으로 새로워지기 시작했다.

PCA 정기총회에서 나는 테리 가이저에게 이끌려 내 또래의 PCA 목사인 스킵 라이언과 조 노벤슨과 함께 점심을 하게 되었다. 뉴욕 이스트 61번가에 있는 트리니티 침례교회 (Trinity Baptist Church)에서 조가 청빙제안을 받았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되었다. 그 교회는 교인수가 100명이 채 안 되는 작은 교회로, 원래는 스웨덴 이민자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지금은 뉴욕 전역으로부터 다양한 중산층 주민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CCC (Campus Crusade for Christ)의 테드 갠디가 이끄는 교회 내 리더들로 구성된 소그룹에서는 더 큰 비전을 품고 있었다. 교회에 아직 목사가 없는 상태에서, 그들은 맨해튼의 전문직 종사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매우 강력한 목사를 모셔오기를 원했다. 갓 시작된 디모스 하우스 (DeMoss House, 캠퍼스 선교단체인 CCC 사역을 하는 단체로, 팀 켈러가 여기에 참여하는 일단의 젊은 전문직 종사자들과 더불어 모임을 시작한 것이 리디머 장로교회의 모체가 되었다- 역주)에서 이들 그룹에 대한 선교를 시작하고 있었다. 트리니티 침례교회의 리더들은 갈보리 침례교회나 트리니티 침례교회가 수준 높고 세련되고, 세속 문화에 단련된 엘리트들을 전도하는데 그리 적합하지 못하며, 디모스 하우스의 갓 회심한 신자들에게 친구들을 데리고 참석할 교회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조가 장로교단에 속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청빙 위원회에서 그를 데려 오려 하고 있었다. (그는 뛰어난 설교자이자 특별한 매력과 경건함을 겸비한 사람이다.) 테리가 나에게 뉴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던 바로 그 무렵인, 1987년 봄, 조는 트리티니 침례교회와 디모스 하우스를 방문해 설교를 했다. 적합한 교회가 세워지기만 하면 당장에라도 터뜨려질 수 있는 잠재력과 뜨겁게 불타오를 수 있는 사역의 가능성을 조는 거기서 발견하였다. 하지만 그는 지금 섬기고 있는 교회를 떠나는 것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래서 그 제안을 거절한 후에 그 이야기를, 코네티컷 다리엔에서 자라 뉴욕에 대해 아주 친숙한 스킵에게 했고, 다시 스킵이 테리에게 이야기해서 그가 우리를 한 자리에 모은 것이었다. 맨해튼에다 설교와 가르침에 능숙한 새로운 복음주의적 교회를 시작할 기회가 무르익었다고 조가 말했다. 이 말은 맨해튼에 교회를 개척한다는 다소 “말도 안 되는” 아이디어에 새로운 불을 지폈다.

첫 번째 현장 답사 - 1987년 가을

1980년대에 뉴욕 플러싱에 언약 교회 (Covenant Church)를 개척한 PCA 목사 샘 링은 첫 번째 현장답사를 위해 방문한 MNA의 짐 해치와 나를 데리고 뉴욕 곳곳을 보여주었다. 그는 우리에게 세 부류의 중요한 인물들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Here's Life의 글렌 클레인크네히트와 디모스 하우스에서 전문경영인 선교사역 (executive ministries, 기업간부들과 전문경영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복음주의적 전도사역으로 CCC가 주최하는 프로그램이다- 역주)을 담당하는 다이앤 벌치와 론 프레이저, 그리고 IVF 출신으로, 기독교 선교연맹 (the Christian Missionary Alliance) 소속 바바라 벤자민 아칠라가 바로 그들이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좋은 주언들을 많이 해주었다. 바바라는 “뉴욕은 다루기가 무척 까다로운 도시예요. 이 곳을 길들여 구원하겠다는 생각으로 여기에 오는 것은 금물이에요. 이곳을 존중하는 태도가 필요해요.”라고 말해주었다. 글렌은 여러 선교사역들이 실패 혹은 반쯤 실패한 원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첫째, 뉴욕이란 도시가 다른 어떤 도시보다 훨씬 더 인구가 집중되어 있는 곳이고, 둘째, 비용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에요. 여기서는 많은 비용이 들어요.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인 것이죠.”

가장 가능성 높은 접촉은 디모스 하우스에서 성사되었다. 그들은 여피족 (yuppies, 미국에서 전후 베이비붐 후반에 태어난 세대로, 도시 (교회)에 사는 화이트칼라의 젊은 엘리트층을 말한다- 역주)을 대상으로 선교사역을 넓혀가고 있던 참으로, 새롭게 회심한 사람들을 어떤 교회로 보내야 될지 모르겠다고 조심스럽고도 재치 있게 시인했다. 그들은 또한 생명력 있는 교회들의 부재로 인해, 디모스 하우스에서 상담, 친교, 예배, 제자훈련 등 교회가 할 기능들을 수행해야 하는 부담들이 커지고 있다는 점을 자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소명이 아니었다. 간사들은 더 많은 좋은 교회들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점에 동의했다. 한 가지 놀랍고도 명백한 사실은 당시에 맨해튼 전체를 통틀어, 정통 목회를 기대하는 전문직 종사자들에게 의미 있는 대안이 될 수 있는 교회가 그리니치빌리지에 위치한 성공회 소속 은혜 교회 (Grace Episcopal)와 웨스트 57번가의 갈보리 침례교회, 고작 두 곳 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긴 하루를 보내고 나서, 짐과 샘과 나는 3번가의 한 식당 (어떤 식당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에서 만나 저녁을 먹었다. 거기서 우리는 MNA가 맨해튼에 새로운 교회를 세울 계획을 공식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할 것과, 그 일을 위해 대책본부를 가동시킬 것을 추천하는데 동의했다. 그때가 10월 13일이었다.

나는 뉴욕에 다시 가서 교회를 시작하는 것에 대해 우리가 접촉한 몇몇 사람들에 직접 이야기하기로 되어 있었다. 디모스 스텝들 중에 어떤 식으로든 우리를 도와줄 몇몇 사람들을 모집하는 것도 특별히 내가 해야 될 일 중 하나였다. 하지만 나는 가을 학기 강의를 하느라 바쁘기도 하고, 담임목사가 누가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새로운 모험에 합류하거나 도와달라고 사람들에게 요청해야 한다는 사실이 두렵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가을이 다 가도록 맨해튼에 갈 수 있는 시간을 굳이 내지 않았다.

핵심 그룹 - 1987년 겨울

보카 레이턴에서 스패니쉬 리버 (Spanish River) PCA의 담임목사이자, 테리 가이저의 친구인 데이브 니콜라스는 테리로부터 맨해튼 교회개척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제법 관심이 쏠리는 이야기였다. 그 해 12월, 그와 그의 아내는 뉴욕으로 휴가를 갔다. 그는 데이브 벌치에게 난데없이 전화를 걸고는 전문경영인 선교회로 그를 찾아 갔다. 데이브 니콜라스는 데이브 벌치에게 새로운 교회에 관여할 마음이 있느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았다. 관심이 아주 많다는 벌치의 대답을 듣고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 “자네, 언제 이 일을 시작할 건가? 이 사람들은 자네를 만날 준비가 돼 있네. 관심 있는 사람들을 모으겠다고 데이브 벌치가 그러네.”라고 말했다. 나는 그동안 내가 너무 굼뜨고 자신없어했던 것이 부끄러웠다. 재빨리 나는 맨해튼 모임을 주선했다. 데이브 니콜라스와 나는 벌치 부부와 그들과 함께 온 다른 세 커플, 글렌과 캐롤 크라인크네히트, 론과 팻시 프레이저, B.J 와 실라 웨버와 함께 만났다. 오랜 논의 끝에 네 커플 중 세 커플이 “동참 하겠다”고 말했다. (이들 세 커플은 CCC 간사들이었다.) 웨버 부부는 지지를 표하기는 했지만, “참여는 하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개척교회를 누가 맡을 것인가?’라는 질문이 드디어 제기되었다. “저는 빼주세요.”라고 나는 말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온 지 이제 삼 년을 살짝 넘겼는데, 벌써 떠나는 것은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는 목사를 찾아보겠다고 약속했고, 그들은 그를 승인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뉴욕 연락망 조성 - 1988년 봄

이 기간 동안 나는 뉴욕에 자주 갔는데, 아마 일주일에 평균 하루 꼴로 갔던 것 같다. 나는 디모스 하우스에 가서 강의를 들었고, 강의가 끝난 다음에는 몇 몇 비 그리스도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여기에 오신 이유가 뭐예요?”라는 질문을 던졌다. 한 사람 (빌 마한)이 이렇게 대답했다. “평생 도시에서 살았지만, 뉴욕에 와서 보니까 이곳 분위기나 압박감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영적으로 중심을 잡아줄 어떤 곳이 필요하단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전문경영인 선교회는 나에게 입에서 입으로 전해주는 중요한 연락망이 되었다. 일반적으로 나는 그리스도인이든, 비그리스도인이든 누군가를 인터뷰할 때면 다음의 두 가지 질문을 했다. ‘맨해튼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정말로 도움이 되고 그들의 마음을 끌만한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그리고 ‘저에게 추가적으로 정보를 제공해줄 수 있고 앞으로 세워질 교회에 대해 관심이 있을 만한 사람이 또 있을까요?’ 그때까지 관찰한 결과, 새로 시작될 교회에 합류시켜야 할 가장 중요한 사람은 오래 믿은 그리스도인도, 비그리스도인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핵심 부류는 이제 갓 믿은 그리스도인들로, 그들은 이전에 다녔던 복음주의 교회들을 통해 생겨난 거추장스러운 기대들을 갖고 있지 않았고, 교회로 초청될 가능성이 있는 많은 비그리스도인들과 여전히 강한 유대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뉴욕에 대한 조사를 계속해나갔다. 피상적인 조사결과에 의하면, 전통적으로 교회개척에 불리하게 작용한다고 여겨지는 “적신호”들이 줄을 이었다. 1) 뉴욕 전체인구의 증가속도가 매우 느리다는 점. 2) 20년 주기설 (a twenty-year trend, 유행 따위가 20년을 주기로 반복된다는 주장- 역주)의 일환으로 백인, 흑인을 모두 포함한 중산층들이 계속적으로 뉴욕을 떠나고 있다는 점. 3) 1987년 월스트리트 붕괴 이후 250,000개의 직장이 사라졌으며 (그때는 아직 몰랐지만) 경기침체가 서서히 시작되고 있다는 점. 4) 범죄가 증가하고 학교의 질이 떨어짐에 따라 삶의 질이 추락하고 있다는 점. 5) 맨해튼에서 활동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비용이 들기 때문에 기부금이나 교단의 지속적인 보조금을 받고 있지 않는 교회는 사실상 한 군데도 없다는 점.

그런데 조사를 더 깊이 해나가는 동안, 중산층의 수가 감소하고 있는 반면, 세 가지 다른 부문에서는 증가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전문적 엘리트 집단, 새로 들어온 이민자들과 인종집단, 그리고 빈민층이 그것이다. 지식 노동자들로 구성된 전문직 계층의 수가 새로이 늘어나고 있었다. 새로 이민 온 노동자 계층으로 이루어진 지역사회들이 어지러이 혼재되어 있었다. 그리고 도시 중심부의 빈민층은 다른 집단들로부터 점점 더 고립되어 가는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복음주의적 개혁교회 거의 대부분은 수적으로 감소하고 있고, 이민 온지 한참 되어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중산층들을 대상으로 섬겨오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교회들에서조차 마찬가지였다.) (아직 명칭이 붙지 않은) 새로운 종류의 포스트 모던한 성향을 보이는 젊은 전문직 종사자들을 전도하려고 애쓰는 교회들은 거의 전무했고, 새로 들어온 이민자들이나 이중문화에 노출된 그들의 자녀들을 전도하고자 하는 교회들도 많지 않았으며, 극빈층 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교회는 심지어 더더욱 적은 형편이었다. 새로 탈바꿈하고 있는 뉴욕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교육 수준이 높고, 자유주의적이며, 수직적 신분상승을 지향하는 젊은 전문직 종사자들과,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새로운 이민자들과 그들의 자녀들, 그리고 빈곤층 가운데 신세대 교회들이 생겨나야 할 필요가 존재했다. 이런 상황을 주목하는 사람들이 나 말고는 별로 없어 보였지만, 이 자체는 가슴 뛰게 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내가 통찰한 것들이 타당한지에 대해 곱씹고 또 곱씹어 보았다.

그러다가 나는 디모스 하우스에서 크리스 휴스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내가 발견한 첫 번째 음악가였고, 교회에 합류하기로 제일 먼저 약속한 사람이었다. 그는 발굴되기만 하면 교회를 엄청나게 풍성하게 해줄 음악적 재능들로 충만한 인재들이 뉴욕 안에 수없이 숨어 있다고 나에게 확신시켜 주었다.

그해 봄, 나는 최고의 목사를 뉴욕으로 모셔오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스킵 라이언을 강하게 밀어 붙여서 나는 맨해튼에서 그를 만나기까지 했지만, 충분히 납득이 가는 가정상의 이유로 그는 결국 오지 못했다. 우리는 또 다시 딕 카우프만을 설득하려고 애썼는데, 6월 중순 무렵, 마침내 그가 오기로 동의했다. 그는 리즈와 함께 뉴욕을 방문하면서, 달튼 스쿨에서 면접을 보게 하기 위해 (당시 13살밖에 안 된) 마이크까지 동반했다. 3주간의 순회설교와 휴가를 위해 영국으로 떠나면서, 캐시와 나는 마침내 누군가를 찾았다는 생각에 안도감을 느꼈다. 특별히 벌치 부부가 개척을 진행하는 일에 엄청난 열성을 보였는데, 왜 그렇게 오래 시간을 끄는지 의아해하는 눈치였다. 여름까지 누군가를 구하지 않으면 결국 핵심그룹이 흥미를 잃게 될 거라고 나는 거의 확신했다.

우리는 왜 그토록 안도감을 느꼈을까? 목사를 구하는 과정에서 캐시와 나는 우리가 설득의 근거로 들고 있는 내용들이 우리 자신에게 효력을 미치기 시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거듭 깨달아가고 있었다. 캐시는 움직이기를 주저하는 한 후보자의 아내 되는 분에게 편지를 쓴 적이 있었다. 그 편지 안에는 여러 가지 어려운 질문들과 더불어, 가도록 격려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문제는 그녀가 한 주장들이 너무나 설득력이 있어서 어째서 우리는 가지 않는 것인지 의아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는데 있다! 나는 좀 더 시간이 흐른 다음, 두 번째 혹은 세 번째 교회를 개척하기 위해 뉴욕으로 가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와 동시에, 정기적인 방문으로 뉴욕이란 도시를 만나면서 그것 또한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 시작했다. 힘과 생명력이 넘치면서도 곳곳에 부서지고 망가진 그곳의 모습이 나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뉴욕 이외의 다른 곳은 지루해보이기 시작했다.

부르심 -1988년 6월

영국에서 집으로 돌아와서 우리는 딕이 오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교회 장로들이 그가 가진 은사와 필요들이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 그와 더불어 애쓰고 노력한 결과, 그들은 그가 가지 않아야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전화를 걸어, 미안해하면서 거절을 표시했다. 그 즉시 나는 뉴욕으로 가서 프레이저, 벌치, 클라인크네히트 부부를 만나 나쁜 소식을 전했다. 회의 도중에 데이브 벌치는 내가 직접 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볼 것을 권유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필라델피아에 있는 제10 장로교회 (TenthPresbyterian)에 전화해서 내가 거기서 한 설교 테이프 몇 개를 받아놓은 상태였다. 그 설교들을 들으면서 그는 나를 새로운 관심을 가지고 보게 되었다. “제 생각에는 하나님이 당신을 여기로 부르시는 것은 아닌지 당신이 고민해봐야 할 것 같아요.” 나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적어도 1년은 더 있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래도 데이브는 나를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좋아요, 그러면 지금으로부터 1년 후에 오시는 걸 생각해보세요.” 나는 생각해본 다음, 2주 후인 7월 1일까지 대답을 주는데 동의했다.

이 일을 맡지 않을 정당한 이유가 내게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 일을 하기에 나 자신이 전혀 적합하지 않다고 느껴졌기 때문에, 거대한 암흑이 내 위에 드리워진 것 같았다. 누구나 어떤 사역에 대해서도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낀다는 것을 알지만, 이 경우는 달랐다. 인간적으로는 누구 못지않게 이 사역에 도전해 볼만한 준비가 되어 있다고 스스로 알고 있었지만, 이것이 어느 누구든 인간의 능력을 훨씬 뛰어넘는 사역이라는 사실 또한 너무나 잘 알았다.

이 말은 딱 한 가지를 의미했다. 내가 가진 재능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의지하느냐가 이번 프로젝트를 결정적으로 좌우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 내 영성이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 (무엇보다 끔찍한 것은, 나 자신이 보는 앞에) 낱낱이 드러나게 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기회가 무르익었으며, 그 문이 몇 주도 채 열려 있지 않을 것임을 나는 또한 알고 있었다. 캐시는 도와주지 않겠다고 함으로써 큰 도움이 되었다!“‘당신이 원하는 대로 할게요, 여보!’라고 말하지 마세요. 이 결정을 나한테 떠넘기지 말아요. 이것은 당신이결정해야 될 문제예요. 곁에서 당신을 지지하겠지만,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당신이에요.”

기도하면서 거널 (Gurnall)의 「그리스도인의 전신갑주 (A Christian in Complete Armour,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14)」를 읽고 있던 중에 한 구절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일개 군단을 지휘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신실한 마음으로 순복하는데 더 큰 용기와 정신의 위대함이 요구된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지휘관이 되는데 필요한 것보다 더 큰 위대함이 요구된다.” 이 일을 맡기로 한다면 그 순간부터 용감해져야 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 착각이라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언제 어느 순간이나 용감한 삶을 살아와야 했던 것이다. 뉴욕의 교회를 거절하게 되더라도, 겁쟁이로 되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뉴욕으로 가겠다! 7월 1일에 나는 1년 뒤에 사임하겠다고 웨스트민스터에 통보했다. 즉각적으로 이전과는 전혀 다른 풍성한 기도의 삶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유는 물으나 마나였다.

금전적 테스트 - 1988년 가을

이전에 글렌이 해준 말과 맨해튼에 사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고 나는 이 사역을 시작하기 위해서 보통 1년 예산으로 필요한 금액보다 세 배 더 많이 필요할 거라고 MNA에 말했다. 나는 난파된 교회에서 살아남은 몇몇 사람들뿐 아니라, 남침례교단과 복음주의 독립교단 (Evangelical Free) 소속 교회 임원들과도 이야기를 나눠 보았는데, 그들은 수년간 맨해튼에 교회를 개척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평균보다 2-3배 높은 비용이 든다는 것이었다. 이는 이 프로젝트가 하나님이 “밀어주시는” 것인지 아닌지 볼 수 있는 첫 번째 테스트였다. MNA가 어안이 벙벙해있는 사이, 테리가 중간에 나서서 허가를 받아냈다. 스패니쉬 리버 장로교회와 the Women of the Church Love Gift에서 100,000불이 넘는 돈을 보내왔다. (테리가 모집한) PCA 소속 두 교회가 각각 60,000불과 50,000불을 기부했다. 또 두 서너 개의 다른 교회들도 15,000불 정도의 돈을 마련해주었다. 이렇게 해서 225,000불 가까운 돈으로 시작하게 되었는데, 첫 해 쓴 경비는 158,000불이었다. PCA 소속의 교회나 다른 어떤 교회도 이 정도의 현금과 예산으로 시작한 적은 내가 알기로는 아무데도 없었다.
이 예산 덕분에 나는 매우 중요한 일 두 가지를 할 수 있었다. 첫째로, 대부분의 맨해튼 목사들이 하듯 교외로부터 통근하는 대신, 뉴욕 중심부에 살 수 있었다. 맨해튼 수준의 집세를 소모한다는 이유로 나는 PCA내부의 몇 사람을 포함하여, 일부 사람들로부터 날카로운 비판을 받았다. 그들이 이것이 청지기적 사명을 저버리는 것이라 말했고, 심지어는 도시의 심장부에 살고 싶어 하는 마음이 교만하고 속물적이라고까지 넌지시 내뱉었다. 하지만 나는 빌 크리스핀과 하비 콘으로부터 가능한 한 교인들 가까이에 사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배워서 알고 있었다. 두 번째로, 우리 교회의 성장속도가 어느 정도 될지가 분명해지자마자 거의 바로 전임 스텝을 새로 구할 수 있었다. 이것 역시 당시로서는 교회개척 과정과 관련하여 선례가 없던 일 이었다. 보통의 경우, 새로 시작된 교회는 프로그램 담당 스텝을 새로 한 사람이라도 더 채용하기 전까지 목회 담당 스텝 (목사) 한 사람만으로 완전히 자립할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출석인원이 200명을 빠르게 넘어서는 것을 보자마자, 나는 헌금이 인원증가율에 못 미쳐서 여전히 외부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스텝을 채용할 수 있었다. 반면에 성장패턴이 어떻게 될지 알기도 전에 여러 명의 스텝을 갖춰놓고 교회를 시작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했었더라면, 오로지 예산을 맞추기 위해서라도 하루 속히 교인수가 400명을 넘어서야 된다는 압박감에 시달렸을 것이다. 그것은 필경 주의를 끊임없이 분산시키는 두통거리가 되었을 것이며, 개개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 좌석을 메운 머릿수에 더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을 지도 모른다.
한 마디로, 그 예산 덕분에 우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나타난 성장패턴에 신속히 반응할 수 있었고, 도시 한복판에 살면서 우리가 전도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환경을 통해 진정으로 힘을 얻고, 또 그 환경을 이해할 줄 아는 스텝을 둘 수 있었다.

뉴욕에서 목회하는 것에 대해 이전에 들었던 말들은 목회 공간을 찾는 일이 악몽이라는 사실을 한 목소리로 알려주었다. 부적절하고 주의 산만한 환경과 자주 이사를 다닐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인해 몸살을 앓는 교회들이 내가 알기로만도 여러 곳이 있었다. 어퍼 이스트 사이드 주변으로 종종 산책을 다니던 론 프레이저가 이스트 87번가 111의 제칠일 안식교 건물을 눈여겨보았을 때 나는 거의 아무런 조사도 해보지 않은 상태였다. 거기서 다른 교회들이 모임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될만한 흔적은 없는 것 같았다. 론이 그 장소에 대해 나에게 말해 주었지만, 전화번호부에서 그곳 번호를 찾을 수 없어서, 론이나 나 둘 중 한 명이 직접 가서 전화번호를 알아 와야 했다. 마침내 담임 목사님 존 맥라티를 만나게 되었을 때, 우리가 그들을 찾아냈다는 사실을 놀라워했다. 여러 가지 행정상의 문제점들로 인해 전화번호부에 번호를 올리지 못했었던 것이다. 나는 1988년 12월에 정식으로 편지 한 장을 썼다. 그는 주일마다 우리에게 장소를 빌려준다는 생각에 대해 마음이 열려 있는 편이었다. 나중에 깨닫게 된 것이지만, 전화 관련 문제 덕분에 렌트할 공간을 찾고 있는 다른 사람들 눈에는 거의 띄지 않는 장소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들이 우리에게 세를 주고 나서 곧바로 여러 다른 그룹들이 그곳을 렌트할 목적으로 그들과 상의하러 왔지만, 이미 우리와 계약을 맺은 후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찾으려는 노력을 거의 하지도 않고서, 훌륭한 장소를, 그것도 엄청나게 저렴한 비용으로 얻게되었다. 우리가 들어갔을 때 해니벌과 시벨 실버는 제칠일 안식교회의 스텝으로 있었다. 그들은 리디머의 사역에 너무나 마음이 끌린 나머지, 안식교회 성도들이 우리로 인해 건물이 손상되는 것을 점점 싫어하게 되자 우리를 그곳에 계속 머무르게 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굉장히 많이 수고하고 애를 써 주었다. 해니벌과 시벨 덕분에 우리는 그 건물을 거의 4년 가까이 사용할 수 있었다. 그 4년은 매우 중요한 시간으로, 그 기간 동안 장소를 옮겨야 했다면, 이제 막 시작된 공동체에 손실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첫 번째 공동체 - 1989년 2월/3월

그 다음 어려운 테스트는 소수의 리더 그룹이 함께 모여 통일된 비전을 “고백”하는 일이었다. 리더인 나는 비전을 세우는 일에 너무 수동적일 수도, 너무 권위주의적일 수도 없었다. 2월 두 번째 주일 오후에 캐시와 나는 (한 번에 아들 한 명씩 데리고) 벌치 부부의 거실에서 새로운 교회를 시작하는 일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과 함께 매주 모임을 갖기 시작했다. 클라인크네히트 부부와 프레이저, 벌치 부부 외에, 우리는 (웨스트민스터 학생으로 만난) 래인과 재키 아서와 (뉴 라이프 교회를 통해 만난) 말린 헨슬리를 데리고 왔다. CCC커플들은 로라 펠스와 캐롤 홀트를 데리고 왔다. 이들이 첫 모임에 나온 사람들이다. 우리는 2월과 3월 내내 함께 만났다. 정기적으로 나온 나머지 사람들은 크리스 휴스, 줄리 드레슬린 (어거스트), 로래인 포터, 캐시켈리 (암스트롱), 래리 화이트와 모니카 메이였다.
나는 그 모임을 성경공부가 아닌, 기도와 비전 모임으로 이끌기로 결심했다. 우리의 목표는 맨해튼에서 복음을 믿는 교회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이어야 하며 또 어떤 모습일 수 있는지에 대해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모임은 각각 한 시간씩 두 파트로 구성되었다. 처음 한 시간은 교회가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자유롭게 생각을 나누는 시간이었다. 처음 몇 주간 우리는 “맨해튼에 사는 비 그리스도인 친구들은 어떤 사람들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다른 말로, 맨해튼 거주 비 그리스도인의 영적 프로필 구성을 위해 머리를 모았다. 그런 다음에 그 프로필에 근거한 계획들을 세우기 시작했다. 우리는 다시 이렇게 질문했다. “이런 종류의 사람들의 필요에 충실하면서도, 성경적으로 확고한 기반을 가진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 몇 주 정도는 이런 질문도 던졌던 것으로 기억된다. “주변에 있는 다른 교회들이 미처 힘을 쏟지 못하고 있는필요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첫 시간을 자유롭게 이야기하는데 사용한 후에 우리는 그 다음 한 시간 동안 함께 기도했다.

우리가 준비해서 기도할 때 사용한 프로필은 어떤 것이었을까? 우리 기도의 대상인 맨해튼 사람들은 대단히 똑똑하고, 자기 분야에서 전문가이거나 그렇게 되기를 열망하는 사람들로, 오랜 시간 상담을 받아온 경험이 있고 심리학적으로 사고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성관계에 매우 적극적이고, 인간관계의 대부분이 직장과 관련된 사람들일정도로 자기 직업에 철저히 몰두하고, 자유주의적 사회의식을 지니고 있었으며, 헌신을 두려워하고 극도로 사적이고 개인주의적이며, 매우 고독하고, 떠들썩한 변화들을 끊임없이 경험했으며, 매우 세속적인 반면, 두세 가지 상이한 종교체계들을 이미 시도해본 적이 있고, 조직화된 종교와 특별히 복음주의적 기독교를 불신하는 경향이 강한 사람들이었다.

내 기억에 (이것을 확인해줄 초기 기록들도 많이 있다), 그 당시 내가 교회에 대해 갖고 있던 비전은 “갓 바른 시멘트 (wet cement, 'urban dictionary'에 따르면 ‘영화배우 지망생들이나 그래피티 예술가들의 텅 빈 화폭’이란 뜻으로, 아직 무르익지 않고 견고하게 확립되지 않은 상태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역주)”와다를 바 없었다. 나는 칭의의 재발견을 통한 영적 갱신에 대해 리처드 러브리스 (Richard Lovelace)와 잭 밀러 (Jack Miller) 식으로 헌신되어 있었다. 도시에 대해 성경이 말하는 중요성을 일반적인 수준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었다. 내가 기여할 수 있을만한 부분은 이 두 가지였다. 나머지 사람들은 이 부분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는 것 같았다. 반면, CCC 사람들은 복음전도에 대한 열정과, 나는 듣기만 해도 머리가 어지러운 구체적인 조직구성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따라서 나는 비전을 내놓으면서 “나를 따르라”고 말하는 식으로 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일들을 하면서 리더십을 유지했다. 토론 중에 직접 토론 내용을 받아 적은 다음, 매주 월요일 메모한 것을 타이핑해서 “이번 주 결정내용”으로 정리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모임 중에 자주 나오는 상충하는 발언들 (가끔은 같은 사람이 그러기도 했다) 중에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또 다른 사람들이 내놓은 생각들을 강조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들은 강조하면서, 전체적으로 일관된 하나의 내용으로 구성해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매주 나는 그 전주에 발견한 내용에 따라 기도편지를 만들어 보냈다. 한 주 한 주, 논의가 진전을 거듭했다. 서서히 하나의 비전이 형성되고 있었다.

이들 모임을 통해 기록하게 된 (당시에 “목회철학 (philosophy of ministry)”이라 이름 붙인) 최초의 비전은 다음과 같은 사명선언문을 포함했다.

맨해튼의 전문직 종사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위해 그들이 관계 맺고 있는 사람들을 전도하게 함으로써 뉴욕시를 변화시키고, 그것을 통해 서서히 뉴욕시 전체를 바꾸는 것.

이 사명선언문은 “이미 수많은 교회가 존재하는 도시에 왜 교회를 새로 시작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대답은 이와 같았다. ‘맨해튼에 살면서 직장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가서 신앙 성장을 경험할 수 있는 동시에, 믿지 않는 그들의 친구들을 인도할 수 있는 교회를 만드는 것.

그것은 또한 현재 우리 교회의 핵심 가치들과 아주 비슷한 신념들을 아래와 같이 작성했다.
1. 복음. 율법이며 동시에 은혜. 복음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율법주의적 교회와 값싼 은혜를 제시하는 교회 모두를 지양.
2. 성경. 권위를 지니되 언약적이고 인격적임. 단지 규범만을 기록한 책도, 단순한 문학작품도 아님.
3. 도시. 하나님은 도시를 사랑하심. 하나님 나라는 도시 안에서 자라나야 함. 도시에서 물러나는 삶, 혹은 도시의 가치들을 그대로 따르는 삶 모두를 지양함.
4. 교회. 연결 기능. 우리가 거주하는 장소와 지역공동체의 특성을 충실히 반영하되, 그 지역과 나라 안의 다른 교회들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교회.

그 두 달 간 우리가 함께 배운 그 밖의 것들
1) 우리는 우리의 역사적 뿌리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실제로 대부분의 뉴요커들이 유일하게 알고 있는 개신교 교단은 “장로교”와 “성공회” 뿐이었다. 그 외에는 전부 “컬트”로 여겨졌다. 우리는 우리가 물려받은 유산을 경시해서는 안 된다. 역사적으로 이어져온 예배나 고전적인 음악이 가진 근엄함은 현대적인 교회예배에 나타나는 감정적 격렬함을 다소 꺼려하는 성향을 가진 문화적으로 세련된 맨해튼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당길만하다. 모임의 모든 사람이 이렇게 말한 것은 아니지만, 이 말을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것 같았다. 나에게는 새로운 깨달음이었다. 내가 필라델피아 뉴 라이프 교회에서 경험한 것은 현대적인 찬양음악에 근거했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 보기 위해 나는 옛날과 지금의 찬양을 모두 시도해보기로 초반부터 결정했다.(1990년대 초 바바라 오노가 디자인한) 우리 교회 로고 또한 우리가 옛 것을 간직하는 동시에 끊임없이 최신의 변화에 발맞춰 갱신하는 교회임을 보여주고자 했다.

2) 우리는 지적이면서 동시에 기독교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 설교를 해야 했다. 맨해튼은 전문성을 추구하는 문화여서, 여기 사는 사람들은 전문가가 아니라고 생각되는 사람의 말은 듣지 않으려 한다. 스스로 아주 똑똑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적으로 도전하는 것이 좋다. 일반적으로 맨해튼 사람들은 단순히 위로받고 인정받는 것만을 원하지 않고, 사고하기를 원하고 직면 받고 싶어 한다. 하지만 성경지식에는 문외한이므로, 신앙의 기초나 기독교적 지식이 거의 없다는 것을 전제로 두고 설교해야 한다.

3) CCC 스텝들의 영향으로 우리는 모든 교인들에게 우정을 통한 전도에 대한 열망을 심어줘야 한다는 마음이 강했다. 비 그리스도인들이 참석하고 있는지 아직 모를 때라도 그들이 있다고 가정하고 설교와 예배가 진행되어야 했다. 그들이 와 있다고 생각하고 설교할 경우, 반드시 초대 받아 오게 될 것이다. 핵심그룹에서 나에게 심어준 확신은 그랬다. 이곳의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이 믿는 신앙에 대해 좋은 인상을 심어줄 누군가에게 믿지 않는 친구들을 데려오고 싶어 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배가 끝나고 난 뒤, “맞지? 내가 말한 그대로잖아.”라고 친구들에게 말할 수 있기를 원했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예배에 참석한 후에 “신앙에 회의적인 내 친구들이 이것을 알게 되면 좋을 텐데!”라고 고백하게 되는 순간이 교회생활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았다.

4) 마지막으로, 우리는 뉴욕이라는 도시에 대한 부정적인 관점을 거부할 필요가 있었다. 핵심그룹의 다양한 구성원들은 각자 서로 다른 경로들을 통해 똑같은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서로의 생각을 강화시켜 주는 통로가 되었다. 글렌과 Here's Life 출신들은 전통적인 CCC 사고방식을 벗어나, 단순히 도시 거주민들을 회심시키려 할 뿐 아니라, 도시 그 자체를 포용하고 사랑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목회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도달하게 되었다. 벌치 부부와 프레이저 부부는 순수하게 뉴욕을 좋아했다. (팻시 프레이저는 파크 애버뉴에서 자랐다.) 우리는 많은 복음주의적 교회들이 도시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결과 그들은 필경 도시에 오래 머물게 되지 않을 사람들을 불러 들였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도시에 거주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도시에 사는 것 자체를 기뻐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사람들에게 교회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나 스스로가 보려고 써놓은 메모장에 다음의 세 가지 선언문이 계속적으로 등장하는 것을 발견했다. 이것은 우리가 초반부에 제시한 비전에 가장 가까운 것이다.

1. 우리는 우리 자신들만을 위한 교회가 아닌, 삶의 현 시점에서 아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없는 친구들을 위한 교회가 되기를 원한다. (이 선언의 배후에는 누군가를 변화시키는 핵심이 복음이라는 확신이 존재했다. 복음은 신자와 불신자 모두가 끊임없이 되풀이해서 들어야하는 것이다.)

2. 우리는 우리 자신들만을 위한 사역이 아니라, 도시 전체의 평화와 유익을 위한 사역을 실천하기를 원한다. 우리의 목표는 단지 보다 훌륭한 교회가 아닌, 보다 훌륭한 도시다. (이 선언을 뒷받침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살면서 섬겨야 하는 장소로 대도시보다 더 적합한 곳은 없다는 확신이었다.)

3. 우리는 단지 하나의 개별 교회가 아닌, 모든 교회들을 섬기고 새로운 교회들을 개척하는 하나의 복음운동이 되기를 원한다. (실제 교회는 너무나 다양하여 모든 인종, 계급, 문화를 포괄하는 것이므로, 어떤 한교회가 도시에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확신이 이것을 뒷받침했다.)

장로교 교인으로서 나는 2달이 아닌, 2년에 걸쳐 숙고하고 계획을 세우는 것에 길들여져 있었는데, CCC스텝들은 (특별히 벌치 부부는) 바로 진행하고 싶은 마음이 열렬했다. 그래서 우리는 4월 첫 주에 재림 소망교회 (Church of the Advent Hope)에서 첫 예배를 드리기로 결정했다. 내가 그때까지 필라델피아에 거주하고 있었고, 오전 예배에 대해서는 실수나 잘못이 없어야 된다는 기대가 있게 마련이라, 우리는 오후 6시30분에 주일 저녁 예배를 첫 예배로 드리기로 결정 보았다. 우리는 이것을 “예배”라 부르지 않고, “뉴욕에 새로운 교회를 시작하는 것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서로 알아가고 가르침을 제공하는 시간”이라 부르기로 결정했다. 이런 식으로 부담감을 덜어야 모든 진행이 순조롭게 진행되리라고 느꼈다. 이렇게 함으로써 다른 참석자들의 부담도 덜어주었다. 그들은 실제로 “교회”에 오는 게 아니었기에, 헌신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낄 필요가 없었다. 50명의 사람들이 첫 예배에 참석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핵심 그룹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각자 지인들을 초대하기로 합의했다.

이제 남은 질문은 이랬다. ‘올 사람이 있을까?’ 또 ‘맨해튼의 갓 믿은 신자들이나 불신자들 등, 적절한 사람들이 올 것인가?’ 첫 예배에는 85명의 사람들이 실제로 참석했는데, 여기에는 뉴저지 쇼트 힐의 PCA 소속 조그만 교회 성도들이 25명 정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이후로는 매주 50~60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맨해튼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젊은 전문직 종사자들, 그것도 대부분 이제 갓 신자가 된 사람들이 디모스를 통해 와서 새로운 교회에 정착했다는 사실이 나로서는 무척 만족스러웠다. 그들의 숫자는 대략 40명 쯤 되었다. 1988년 9월에 나는 디모스에서 설교한 적이 있었는데, 그들 중 일부는 그것을 계기로 오게 되었다. 5개월 반 가량 저녁 예배를 이어가는 동안, 인원수가 꾸준히 늘어났는데, 심지어 여름에도 마찬가지였다. 예배에는 성경 노래들과 찬송가가 섞여 있었다. 여름에 켈러 가정이 뉴욕으로 이사했다. 9월 무렵에는 저녁 예배 참석 인원이 평균 100명에 다다랐다. 놀라운 정도로 많은 비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그리스도인 친구들의 인도를 받아 참석하게 되었다. 뭔가 되어가는 것 같았다.

1989년 9월 마지막 주일, 우리는 “공식적으로” 교회 문을 열고, 오래된 고전풍의 음악을 바탕으로, 어느 정도 예배의식으로서의 형식을 갖추고 오전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현대적인 예배형식을 채택하고 있는 저녁예배는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오전과 오후 예배를 모두 드리는 30명을 포함, 각각의 예배에는 90명의 인원이 참석했다. (따라서 참석인원이 모두 150명에 이르렀다.) 가을 무렵, 처음으로 회심자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권능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예배가 끝마친 후에는, 교회 아래 위층이 꽉 차도록 사람들이 그룹별로 무리지어 대개 한 시간을 더 이야기를 이어가곤 했는데, 종종 매우 개인적이고 영적인 문제들이 나누어지곤 했다. 교회가 작았기 때문에 나 (혹은 다른 리더들)는 매주 새로 나온 사람들을 대부분 만나볼 수 있었다. 각 주 참석인원의 약 20퍼센트가 비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점이 명백해졌다. 우리는 비공식으로 안내봉사를 담당할 조정 위원회를 시작했다. 그리고 금요일 아침마다 기도모임을 가졌다. 매주, 거의 모든 구성원이 자기들이 교회에 인도했거나, 교회에서 만나고 있는 비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간증들을 나누었다. 1990년 1월경이 되자, 평균 참석인원이 200명을 넘어섰다. 봄부터 우리는 오전 예배와 똑같은 형식의 오후 4시 예배를 시작했다. 6월 무렵이 되자 전체 교인수가 거의 300명에 다다르게 되었고 7, 8월 사이에는 그 수가 실제로 400명 가까이 도달했다.

목사로 시무하는 동안 나를 성장시킨 가장 큰 경험 중 하나는 예배에 나온 사람들과 매주 만나는 것이었다. 보통 그들은 예배 후에 나에게 와서 “이야기하고 싶어요”하고 말했다. 특별한 직무도, 신경써줄 스텝들도 없던 차라, 매주 25~30명의 사람들을 만나 (대부분 트램웨이 카페에서), 영적인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놀랍게도, 그들 중 대부분은 비 그리스도인들이었고, 내가 알지 못했던 다양한 세계로 나를 안내했다. 한 여성은 아이비리그 학위를 가진, 하룻밤 700불 받는 콜걸이었다. 많은 젊은 남자들과 몇몇 여자들이 동성애자로 살아가는 삶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월스트리트에서 일하면서 받는 압박감에 대해서도 금세 알게 되었다. 불교신자와 회교도들과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모든 경험이 이루어낸 가장 흥미로운 결과는 설교에 생긴 변화였다. 매 주, 스무 명도 넘는 사람들이 내 설교에 대해 (종종 무심코) 매우 직접적인 피드백을 해주었다. 나는 내 설교의 어떤 부분들이 적중하고 있는지, 사람들의 관심을 간파하지 못하고 오히려 혼란스럽게 하는 부분은 어떤 것들인지 재빠르게 깨달아갔다. 현실적인 평가들을 수없이 적나라하게 들으면서 설교가 꾸준히 변화되어 갔다.
처음 헌금을 걷은 이후로 매주 3,000불씩 헌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첫 해 예산으로 딱 필요한 만큼이었다. 나는 즉시로 첫 해 예산을 상향 조정했고, 스텝을 더 뽑기 시작했다. 1989년 12월, 우리는 이본느 도드를 행정담당자로 채용했다. 1990년 5월, 우리는 파트타임 목회비서로 스콧 셔먼을 채용했는데, 당시 그는 프린스턴 신학교 대학원생으로 뉴욕으로 통근하고 있었다. 1990년 8월, 전임 협력목사로 제프 화이트를 뽑았다. 그때 당시 제프는 필라델피아 제10 장로교회 부목사로 일하고 있었다.

첫해가 끝날 무렵, 우리는 교인 전체에 대한 몇몇 조사를 실시했다. 우리는 메일링 리스트에 있는 사람들 중 삼분의 일 이상이 어퍼 이스트 사이드 우편번호를 쓰는 세 곳 중 한 곳에 살고 있어서, 걸어서 교회에 올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지금보다 백인 교인의 수 (80%)와 독신 교인의 수 (85%)가 더 많았다. 또 기쁘게도, 오래된 복음주의 신자들 중 상당수는 우리 교회로 발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트리니티 침례교회에 부임한, 잘 알려진 목사인 고든 맥도날드가 뉴욕으로 이주하는 복음주의 신자들 대부분을 끌어갔다. 성공회인 올엔젤스 교회 (All Angels Episcopal)의 마틴 민스의 경우, 은사주의적 성향이 강한 목회스타일을 가지고 있었다. 이 말은 곧, 도시 전역에서 통근하거나, 도심으로 이사 온지 오래 되지 않아 아직 뿌리가 내려지지 않았거나 믿지 않는 뉴요커들과의 연결고리가 많지 않은 복음주의적 그리스도인들이 우리 교회에 그리 많이 등록하지는 않았음을 의미했다.

목회의 중대한 분수령들

#1 복음전도와 갱신 (1989 ~ 1990)
목회사역을 가늠 짓는 제일의 분수령 혹은 목표는 영적 갱신을 위한 동력을 사역의 핵으로 가진 교회가 되는 것이었다. 복음이 진정 능력이 될 것인가, 그래서 잠자고 있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이 깨어나고, 맨해튼이라는 프로의 세계에서 삶과 일을 영위하는 진정 세속적인 비 그리스도인들이 회심케 될 것인가? 이것이 진정한 동력으로 성장하여, 회심이 여기저기서 관찰되는 “일회성” 사건이 아닌, 조직적인 현상으로 자리 잡게 될 것인가?

앞에서 적었듯, 1989년은 많은 성장을 보여준 해였다. 하지만 그 해 말에 이르러서야 얼마나 많은 비 그리스도인들이 새롭게 예배에 참석하고 있는지가 분명해졌다. 그리고 다음으로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것은 신자들 사이에 굉장한 흥분을 불러일으켰고, 보통 때라면 리디머를 선택하지 않았을 많은 신자들이 이제 비 그리스도인 친구들을 데리고 오기 위해 리디머를 찾았다. 그러고 나서 1990년 가을에는 폭발적인 새로운 성장을 경험했다. 그해 9월, 대략 300명의 사람들이 각각 오전과 오후예배로 몰려들어, 전체 예배 참석자 수가 500명 (둘 다 참석하는 사람 수를 제하고) 을 넘어섰다. 이제 확고하고도 건강한 회심현상이 하나의 계속적인 흐름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구체적인 통계를 제시하는 것만으로 첫 3년간 경험한 사건들의 의미를 전달하기는 어려운 면이 없지 않다. 1970년은 전국의 많은 캠퍼스에서 영적 갱신과 부흥의 물결이 일어났던 해다 (e.g. 애즈베리 부흥; 예수 운동). 내가 있던 캠퍼스 선교단체만 해도 한 해 사이에 20명에서 120명으로 성장했다. 캐시 역시 같은 기간에 그녀가 다니던 대학에서 똑같은 일을 경험했다. 내가 처음 뉴욕에 오기 시작해서 성경연구모임들을 찾아다녔던 1988~89년 사이, 나는 근 20년 전에 경험했던 것과 똑같은 기류가 생성되고 있는 것을 느꼈다. 우리가 마침내 뉴욕에 와서 사역의 문을 열었을 때, 캐시와 내가 그때 그 부흥의 때에 경험했던 하나님의 임재의식이 되살아났다. 그 첫 3년 동안, 영적 각성의 때에 느껴지는 것과 동일하게, 뭔가 필연적인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느낌이 팽배했다. 복음이 전혀 새로운 것처럼 보였고, 잠자고 있던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이 한 순간에 깨어났으며, 매 주 새롭게 회심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공기 중에 뜨거운 전류가 흐르는 듯 했다. 내리는 결정마다 현명한 것으로 드러났고, 모든 사람이 자신의 은사와 능력의 한계를 뛰어넘어 그 이상의 일들을 해냈다.
1990년 가을, 오전 예배를 하나 더 시작하게 되어, 결국 예배 시간은 오전 10시, 11시 반, 오후 4시, 6시 반이 되었다. 1991년 늦봄 쯤 되자, 참석인원수가 거의 700명으로 뛰어올랐다. 1991년 봄, 나는 처음으로 200명의 사람들을 등록교인 (‘members’, 그대로 직역하면 (교회) 구성원이란 의미를 갖는데, 한국교회에서 상용되고 있는 용어로서는 ‘등록교인’이란 용어로 그 뜻이 잘 전달될 것이라 여겨 그렇게 번역해 두었다-역주)으로 받아들였다. (교회를 개척한 당사자로서 나는 직접 인터뷰를 통해 등록교인을 받을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다음, 등록교인들에게 직분자들 (officers)을 선출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나는 90명의 남성과 110명의 여성을 등록교인으로 받아들였다. 남자 중에 18명은 스스로 자신들이 게이라고 나에게 털어놓으면서 (나는 아무에게도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었다), 그 생활을 청산하고 게이라는 정체성 없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다고 덧붙였다. 비공식적 통계를 통해 나는 등록 교인의 15~30퍼센트가 리디머에 들어와서, 혹은 리디머를 통해 새로 믿게 된 사람들인 것을 발견했다. 이 후에 우리는 여러 명의 성인들을 대상으로 세례식을 거행하기 시작했다. 매달, 나는 유대인들과, 이전에는 무신론자나 불교도였던 사람들, 그리고 리디머나 디모스 하우스를 통해 새로 믿은 많은 신자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1989년 후반부터 1990년 중반까지, 우리는 5명의 핵심스텝들을 결성했다. 맨 먼저 이본느 도드, 그 다음 스콧 셔먼, 다음은 제프 화이트. 캐시와 나를 포함한 이들 5명이 첫 2년 간 기본적인 핵심 스텝 진을 형성했다. 이들은 맨해튼에 거주했고, 전부 교회가 가진 비전을 마음으로 깊이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었다. 이들 모두는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일에 직접적으로, 또 개인적으로 열매를 맺고 있었다. 모두 다 다방면의 지식과 재능을 가진 사람들로, 다양한 사역들을 감당했다.
1991년 봄이 되자 우리는 재정적으로 자립하게 되었다. 1991년 봄에는 최초의 장로들, 집사들, 여 집사들이 선출되었다. 장로들은 아서 암스트롱, 데이브 벌치, 글렌 클라인크네히트, 데이브 비스그로브였다.집사들은 조 리틀, 빅 무에크, 샘 휘틀리, 래리 화이트, 다이앤 벌치, 이본느 도드, 로라 펠스, 말린 헨슬리, 캐시 켈리, 바바라 오노였다. 1991년 6월 1일 주일, 57번가에 있는 갈보리 침례교회에서 드린 예배를 통해, 우리는 비로소 하나의 교회로서 공식적인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테리 가이저는 설교자였다.

#2 소그룹 (1991부터 1993년까지)
1991년에서 92년 사이에 우리는 성장을 거듭하여, 1992년 봄 무렵이 되자 주일 참석 인원이 850명이 되어 있었다. (평균 참석인원이 오전 10시에 200명, 오전 11시 30분에 250명, 오후 4시에 130명, 저녁 6시 반에 400명이었고, 저녁 예배 참석자 중 삼분의 일은 오전 예배도 참석하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1991년에 헌금 총액은 694,000불로, 그 기간 동안 우리는 상담 담당 스텝으로 캐롤 홀트를 추가로 채용해서, 풀타임 월급을 받는 스텝수가 6번째 스텝인 캐시 켈러를 빼고, 총 5명으로 늘어났다.

1992년 말에 우리는 추가적인 조사를 실시했다. 4번의 예배를 통틀어 참석인원이 약 1000명에 다다랐다 (두 번 참석하는 사람 수를 빼고). 매주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이 최소 50~60명이었고, 현재 참석자의 25~30%가 비 그리스도인으로 추정되었다. 1992년에는 1,000,000불이 약간 웃도는 헌금이 들어왔다. 완전히 녹초가 되면서도 기쁘기 그지없는 3년간의 사역 이후에, 어림잡아 대략 250명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그 중 약 반 정도가 교회에 합류했다.

소그룹 사역은 자리를 잡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다. 소그룹 개념에 대해 내가 대략 설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주일 예배에 500명이 참석하고 있던 1990년 가을 내내 고작 3개의 소그룹만이 가동되고 있었던 것 같다. 레인과 재키 아서 부부, 제프 화이트, 그리고 내가 각자의 가정에서 모임을 인도했지만, 그것으로는 필경 역부족이었다. 이런 환경에서 소통, 양육, 돌봄 등을 잘 해내기가 내가 지금껏 경험하고 상상해온 것보다 훨씬 더 어려웠다. 젊은 독신 참석자들에게는 스스로 어찌할 바를 알 수 없는 도덕적, 심리적, 윤리적 문제들이 놀랄 만큼 (순진한 내가 볼 때!) 산적해 있었다. 그들과 소통하고, 전통적 목회 방식인 심방을 통해 그들을 관리하고 보살피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높은 수준의 소그룹 사역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래서 스텝들은 칼 조지 (Carl George)가 “셀 교회”에 대해 쓴 책을 읽기 시작했고, 우리는 리디머에 그 모델을 채택하기로 결정했다. 교회 안에서 개개인을 보살피고 돌보는 주된 방식으로서 소그룹에 필적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거의 모든 교인들, 다시 말해 대부분의 정기적인 예배 참석자들과 많은 비 그리스도인들이 매주 소그룹에 참여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될 것이다. 우리는 그 모델을 계속적으로 붙들었다. 소그룹을 인도하는 제프 화이트의 타고난 능력으로 인해 우리는 그를 첫 번째 “셀 전문가”로 삼기로 했다. 개척 2년째 되던 (1991년) 봄 무렵 우리는 제프의 지휘 아래 12개월도 채 안 되어 3개에서 23개까지 늘어난 소그룹을 갖게 되었다. 제프 화이트가 스텝을 그만둔 후부터, 드루 필드가 그의 자리를 물려받아 셀 시스템을 훌륭하게 이끌어갔다.

시간이 흐르면서, 셀 시스템은 나름의 기복들을 겪어왔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그것은 우리 교회의 훌륭한 성공사례 중 하나로 꼽힌다. 리디머가 계속해서 엄청난 수의 방문자들, 구도자들, 관찰자들을 매주 맞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셀 시스템은 기본적으로 대략 참석인원의 40~60%정도의 사람들을 수용해올 수 있었다. 예배 참석인원의 수가 치솟을 때면, 셀 시스템이 그것을 따라잡기까지 적어도 1년의 시간이 걸리지만, 결국은 늘 따라잡는다. 셀 모델은 1980년대 후반과 90년대에 꽤 유행하다가 대부분의 교회들이 그것을 포기했다. 우리는 지금까지도 계속 그것에 전적으로 헌신해오고 있으며 그것이 가져다준 결과에 만족해하고 있다.

#3 성장 그리고 동기를 부여할 줄 아는 리더들 (1993 ~ 1996)
1993년 초 무렵 참석인원의 증가세가 둔화해가고 있는 것이 분명해졌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존재했다. 첫 번째 이유는 공간이었다. 참석인원이 매우 서서히 증가할 수밖에 없는 4시 예배를 제외하고는, 제7일 안식교회 공간은 우리에게 턱없이 부족해졌다. 어떻게 해야 할까? 성장 그 자체는 우리 교회의 목표가 되지 않았지만, 복음전도는 분명 우리의 목표였다. 헌터 칼리지 강당으로 옮겨갈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 우리는 어려운 선택을 내려야 했다. 우리가 만일 카네기 힐 중심부에서 벗어난다면 (또 교회건물에서 공공기관의 대규모 공간으로 이동한다면), 어퍼 이스트사이드에 국한된 교회에서 보다 맨해튼 전체를 포괄하는 교회로 탈바꿈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동하기로 결정했는데, 그 주된 이유는 리디머의 문을 열고 들어오기가 어렵게 만드는 것이 이기적인 것 같다는 것이었다. 덧붙여, 우리가 더 커지고 어퍼 이스트사이드만의 특성에 덜 안주하게 된다면, 뉴욕시 권역 전 지역에 새로운 교회들을 일으키기가 더 용이해질 것 같았다.

우리는 1993년 봄에 헌터 칼리지로 이사했다. 우리 교회 역사상 참석자수가 늘지 않은 해는 이때가 유일했다. 우리는 그곳의 (불쾌한) 물리적 환경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어퍼 이스트사이드 거주민들을 여럿 잃었다. (헌터 칼리지의 강당은 관리가 양호하지 못한 상태였다.) 새로운 공간에서 오전예배 참석인원은 고작 650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저녁 예배 인원은 훨씬 더 적어서 약 450명 정도였다. 새로 앉아 예배드리게 된 공간은 소리가 울리는 곳이었기 때문에 예배 때 느꼈던 강렬함과 친밀함이 현저히 감소했다. 우리가 부르는 찬양소리가 그 공간을 가득 메우지 못했다. 게다가 이동에 따른 비용도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들어서, 1993년 10월에는 예산이 극도로 빠듯해졌다. 그 이후부터 매년 이런 재정적인 문제가 하나의 패턴이 되어버렸다. 처음 3년 동안은 성장이 기하급수적으로 일어난 결과, 직관적으로 필요가 느껴지는 곳에 비용을 지출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 이후에 우리는 예산부족을 겪는 여름을 위한 예비비를 전혀 남겨두지 않는 예산사용의 관행이 있음을 발견했다. 매 해마다 우리는 줄이고 모으고 하면서 8월부터 11월까지의 비용을 충당해야 했으며, 어느 핸가는 월급을 지불하기 위해 많은 대출을 받아야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간의 장벽이 사라지자 다시금 성장이 시작되었다. 헌터 칼리지는 적극적이고 친절한 건물주로 입증되었다. 하나님이 다시 채우셨다.

하지만 우리가 이사한 후에야 자각하게 된 두 번째 성장장벽이 존재했다. 스텝인원이 증가함에 따라, 내가 돌보아야 할 범위가 이제 감당하기 힘든 지경으로 불어남으로 인해, 관리감독이 점점 부실해지는 사태가 벌어졌다. 어떤 스텝들은 이 상황을 좋아했지만 더 나은 책임감이 필요했던 반면, 다른 스텝들은 이 상황을 싫어한 나머지 의욕을 상실하게 되었다. 육체적으로, 감정적으로 1993년은 나에게 가장 힘든 한 해였던 게 거의 확실하다. 나는 위험할 정도로 탈진해 있었다. 1993~94년 사이에 담임목사와 대등한 자격으로 교회운영을 총 책임질 행정담당 목사 (executive pastor)를 찾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1988년 당시 개척을 담당할 목사로 거의 정해졌었던 딕 카우프만이 그 일을 맡기로 동의했다. 1994년 여름에 그는 가족을 데리고 뉴욕으로 이사했다.

딕은 드루 필드, 데이브 비스그로브, 아서 암스트롱 (모두 비즈니스와 경영 분야에 전문가들이다)의 도움을 받아, 사역의 구조를 완전히 수정했다. 딕의 지휘 아래, 리디머의 리더십은 각자의 권한이 강화된 리더십 팀들로 분산되었다. 모든 결정에 대해 일일이 허락을 구하는 대신, 이들 팀들은 더 많은 결정들을 스스로 내린 다음에 그 결정들에 대해 스텝들과 당회에 보고하기만 하면 되도록 했다. 스텝들은 단순히 일하는 사람 혹은 일하는 사람들을 이끄는 리더가 되는 것을 넘어, “리더들의 리더”가 되라는 도전을 딕을 통해 끊임없이 받게 되었다. “당신이 훈련시킨 사람들에게 당신이 하던 일을 맡기고, 그런 다음에는 당신의 허가를 구하지 않고도 그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그들에게 부여하라.” 이것이 늘 주문처럼 되풀이되는 말이었다. 이것이 광범위하고 전면적인 변화였음을 감안하면, 비록 2년이란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변화의 과정은 순조로웠다. 많은 애로점들이 해결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치르게 된 한 가지 실제적인 대가는 설교자가 더 이상 모든 사람의 목사와 감독자가 아니란 점이었다. 두 번째 실제적인 대가는 이제 훨씬 더 많은 일들이 처리되긴 하지만, 전체를 통제하는 구심력이 부족하고 그 결과 크고 작은 실수들이 더 많아졌다는 점이다. 이런 대가들은 그 혜택에 비하면 사소한 것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훨씬 더 큰 조직으로 갖춰지기 위해 필요한 일들을 하기로 결정했다. 물론, 권한을 분산하고 나눠준다는 기본 원리들은 교회가 성장해감에 따라 재정비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기본원리에 대한 충실함은 변함없이 유지되었다.

절차에 대한 딕의 세심한 가르침과 상세한 관리 덕분에 서서히 변화가 일어났다. 이것은 세 번째 중요한사역의 분기점이었다. 처음의 두 분수령은 특별히 외부 지향적인 복음주의적 공동체의 확립, 그리고 교회 내 친교의 방향을 셀 모델로 전환한 것이었다. 더불어 두 개의 새로운 자(子)교회 (daughter church, 나중에 나올 멀티사이트 모델에서의 개별 ‘지교회 (site)’와 구분하기 위해 ‘자교회’로 번역해두었다 -역주)가 시작되었는데, 스콧 셔먼이 이끄는 로어 맨해튼의 빌리지 교회와 크레이그 히긴스가 이끄는 교외지역의 트리니티 교회가 그것이다. 이 두 명의 개척 목사들은 행정담당 목사의 감독을 받았다.

#4 대형교회에서 하나의 운동으로 (1996 ~ 2001까지)
딕이 주도한 모든 변화들을 뒤이어, 리디머는 다시금 빠른 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모든 예배의 참석인원을 다 합친 수가 1994년 봄에 1,150명이었다가 1995년 봄에 이르러는 1,450명으로 올라갔다. 그러고 나서는 그 다음 3년 간 한해 약 200명가량씩 증가했다.
1996년 겨울, 뉴욕 오시닝에 있는 한 수녀원에서 딕과 나는 세 가지 늘 따라다니는 문제들 혹은 걱정거리들을 두고 한바탕 고민하고 논의하는 시간을 가졌다. 세 가지 문제란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매년 계속되는 재정 부족사태, 정치적 문제 혹은 수리 문제로 인해 헌터 칼리지 공간을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우리가 시작한 새로운 개척 교회들에 대해 충분한 감독을 하지 못해왔고, 더 많은 새로운 교회들을 키워내기 위한 시간을 마련한 방법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 등. 리디머가 성장할수록, 크레이그 히긴스, 스콧 셔먼, 그리고 할렘에서 사역을 시작하기 위한 과도기에 있는 제프 화이트와 같은 개척 목사들을 위해 딕과 내가 낼 수 있는 시간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헌터 칼리지 외에 또 다른 공간을 찾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중, 우리는 멀티 사이트 교회 (a multisitechurch)로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맨해튼에 결과적으로 네 개의 새로운 교회들을 세우게 되는 통로가 될 것이다. (새로운 사람들을 수용하기 위해) 새로운 예배를 시작해야 할 때마다 센트럴 파크 주변 어딘가 새로운 장소에 그것을 시작한다는 비전이었다. 이렇게 하면 “자교회”가 아닌, 똑같이 리디머인 네 개의 지(支)교회가 생겨나게 되고, 그 각각의 장소에서 담임목사가 똑같은 설교를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각 지교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다시금 자기 동네에서 예배를 드리게 됨으로써, 우정 전도를 하고, 다른 성도들과 교제하고, 지역사회를 섬기는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강화된다. 이 모든 과정을 재정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대대적인 기금 모금 운동 (Capital Fund Campaign)을 벌일 필요가 있다는 것을 딕은 즉각적으로 파악했다. 더 나아가, 그렇게 함으로써 교회 전반적인 재정에 훨씬 더 많은 여유가 생기게 될 것이고, 새로운 교회 개척을 감독할 스텝들을 새로 채용할 수도 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단지 하나의 교회가 아닌, 하나의 운동이다”는 말을 항상 해왔지만, 우리는 그 비전을 실현할 구체적인 방법은 하나도 갖고 있지 못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이것이 실현될 수 있을지 보기 시작했다. 또한 우리는 대형교회들의 문제점들, 특별히 대형교회 창립목사의 뒤를 이을 목사를 찾는 문제에 대해 늘 이야기해 왔었다. 한 마디로, 멀티 사이트 교회인 리디머의 네 개의 지교회들은 그 각각이 하나의 교회가 될 것이고 내가 은퇴한 후에는 각자가 자기의 담임 목사를 청빙하게 될 것이다. 이 계획은 여섯 내지 일곱 문제들을 한꺼번에 해결하는 것 같았다! 우리가 리디머에 대한 또 하나의 대대적인 개편계획을 발표했을 때 스텝들의 얼굴에 떠오르게 될 표정들을 상상하면서 우리는 짓궂은 웃음을 머금고 수녀원으로부터 차를 몰고 돌아왔다. 이 이야기를 캐시에게 해 주었을 때 캐시가 내지른 고함소리 때문에 고양이가 깜짝 놀랐다.

이것은 리디머 교회 역사상 네 번째의 주요한 분기점이었다. 우리가 리더들과 스텝들, 또 성도들에게 우리의 비전을 제시한 이후, 그것에 대한 수정이 완료된 것은 1996년 말에 이르러서였다. 그런 다음에 우리는 1997년 봄 기금 모금 운동을 실시하여 430만 불의 기금약속을 받아냈다. 이 덕분에 우리가 멀티 사이트교회 모델로 나아갈 수 있는 기반과 더불어, 리디머 교회개척 센터 (Redeemer Church Planting Center)를 시작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이 돈은 이 두 가지 목적을 위해 똑같이 배분되어야 했다. 멀티 사이트 교회로 가기 위한 구체적인 첫 조처들이 1997년 가을에 취해졌다. 그때부터 나는 새로운 모델로의 전환을 준비하는 차원에서, 아침과 저녁 예배에서 하나의 설교만 하기 시작했다. 두 번째 구체적인 조치는 1999년 2월에 시작되었는데, 우리는 첫 번째 새로운 장소에서 세 번째 예배, 즉 웨스트사이드 저녁 예배를 시작했다. 불행하게도, 시간 (오후 5시)과 건물 (96번가와 CPW (Central Park West- 역주) 에 위치한 크리스쳔 사이언스 제일교회)이 여러 가지 이유에서 최적이 아니었다. 하지만 2000년 가을, 우리는 웨스트사이드에서의 모임을 86번가와 웨스트엔드 애버뉴 접점에 위치한 세인트 폴/ 세인트 앤드류 감리교회로 옮겨 저녁 7시 예배로 드리게 했다. 이번에는 상황에 처음부터 순조롭게 풀려서 우리는 새로운 모델의 첫 열매들을 얻게 되었다. 2001년 가을 무렵, 정기적으로 예배에 참석하는 인원이 600명을 넘어갔고 그 이후로도 성장이 이어졌다. 그야말로 성도 대부분이 “웨스트사이드 주민들”로, 보다 여러 지역을 아우르는 헌터 칼리지에서의 예배보다 그쪽 지역 자체에 보다 더 관심을 집중한다.

계획을 실행하기 (1999년에서 2001까지)
1999년 여름, 딕이 샌디에이고에 교회를 개척하기 위해 리디머를 떠나고, 이 글의 맨 첫 문장에 등장하는 인물인 테리 가이저가 행정담당 목사로 부임했다. 여러 가지 면에서 볼 때 테리에게 맡겨진 사명은 딕과 내가 교회에 대해 세워놓은 계획을 실행하도록 돕는 것이다. 테리는 그 비전에 완전히 헌신된 사람이었다. 딕이 리디머 역사상 자신에게 맡겨진 장(章)을 감당할 완벽한 경험과 준비가 갖춰진 사람이었던 것처럼, 테리 역시 이 사명을 감당할 준비가 갖춰진 사람이었다. 테리의 지휘 하에 우리는 교회개척 센터를 이끌 사람으로 오즈니 페레이라를 청빙했다. 우리는 개척 목사들을 평가하고, 훈련하고, 감독할 도구들을 계발하기 시작했다.

리디머의 이 네 번째 성장국면을 실행하기 위해 우리가 직면해야 할 몇 가지 문제들은 무엇일까? 첫째, 우리는 확정된 멀티사이트 모델을 완성해야 한다. 2003년 겨울, 우리는 64가와 센트럴 파크 웨스트 사이에 있는 윤리문화 협회 (the Ethical Culture Society) 건물에 웨스트사이드 오전 예배를 진행하는 지교회를 열었다. 그 예배가 좀 더 구체적인 교회의 모습을 갖추도록 돕기 위해 우리는 이스트사이드 저녁 예배를 드릴 수 있는 또 다른 장소를 찾아야 할 수도 있다. 그 뿐 아니라 우리는 각각의 지교회를 자치적으로 운영되는 교회의 모습에 가깝게 되도록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이것은 이 글을 쓰는 시점으로부터 몇 년은 더 걸려야 될 일이다. 둘째, 리디머 교회개척 센터는 리디머의 자교회들, 리디머와 별개의 교회들, 다른 도시에 기반을 둔 교회들을 매년 바람직한 숫자만큼 정기적으로 개척해야 한다. 셋째, 우리는 성도들을 체계적으로 훈련하고, 스텝과 목회자들과 더불어 평신도 지도자들을 발굴해내어 훈련시킬 훨씬 더 나은 시스템을 개발해야한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목표들을 충족시키기 위한 재정적 자원을 마련해줄 개발 부서 (a Development Department)가 있어야 한다.
“하나의 운동으로 변모해 나가는” 이 새로운 국면에 직면하여 훈련 혹은 리더십 양성의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어떻게 하면 교회의 초창기 리더들이 자신들의 사역, 철학, 비전, 기술 등에서 자신들과 똑같은 리더들을 재생산하여, 수백 명의 새로운 평신도 지도자들이 도시 곳곳으로 쏟아져나가 몇 안 되는 초창기 리더들이 하던 사역들을 감당하는 일들이 가능해질까? 어떻게 하면 교회가 스스로를 재현하여 하나의 통일된 비전을 지닌 수십 개의 교회들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상처를 치유하고 문화를 새롭게 함으로써 뉴욕을 섬길 수천의 그리스도인들을 준비시킬 수 있을까? 리더들을 재생산하고 훈련시키는 법을 배우지 않는 한, 증식은 불가능하다.

리디머 역사상 이 “하나의 운동으로 변모해 나가는” 장이야말로 여러 다양한 국면을 가진, 따라서 가장 긴 시간이 소요되어 온 장이었다. 하지만 몇 가지 면에서 미루어볼 때, 어쩌면 완성까지 단 2, 3년의 시간밖에 남지 않은 듯하다. (멀티사이트, 교회개척 센터, 리더 양성과 훈련 시스템, 개발 등의) 메커니즘들이 도시 전역에 리디머와 닮은 교회들과 리디머의 도움을 받는 교회들을 일으킬 하나의 운동창조라는 목표를 향해 적극적으로 나아갈 수 있는 틀로 자리 잡게 될 것이라는 의미에서의 완성이 될 것이다.
그 다음에 해야 될 일은 무엇인가? 우리가 주력을 쏟아야 할 또 다른 확실한 장이 존재할까? 나는 다음의 가능성을 단지 제안할 따름이다. 리디머의 핵심 가치들은 언제나 세 가지 수단을 통해 도시를 변화시키는 일에 개별적으로 집중해왔다. 교회 개척, 자선과 정의를 위한 사역 (Mercy and Justice Ministries), 일터 사역(Marketplace Ministries)이 그것이다. 이들 핵심 가치들 중에서 과거 우리가 가장 적게 실천한 것은 “일터”의 영역이다. 리디머를 구별하는 특징 중 한 가지는 그리스도인이 목사가 되는 것만으로는 세상이 변할 수 없다는 점을 우리가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직장에서, 남들과 구별되는 탁월함으로 자신들의 일을 해나감으로써 그리스도를 위해 사람들을 전도할 창의적인 방법들을 발견해가는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세상은 변화될 것이다. 리디머에서 하듯이, 이 부분에 대해 논의하고 평신도들로 하여금 이러한 삶을 살도록 훈련시키는 연구센터들을 갖춘 다른 교회들도 존재한다. 하지만 뉴욕시에서 문화형성의 실제적인 동력을 주도해가는 것은 단연 리디머라 할 수 있다. 어떤 식으로 우리는 그것을 주도하고, 영향을 미치고 있는 걸까?
이러한 목적을 위해 우리는 2002년에 일터사역을 이끌 담당자로, 실리콘 밸리 출신의 캐서린 리어리를 기용했다. 이런 유형의 사역을 해나가는데 있어서의 어려움은 이 사역이 성경해석과 전도부터, 업계, 더 나아가 브로드웨이를 위한 대본을 쓰는 일까지 모든 것을 포괄한다는 점이다. 캐서린은 즉시 사역에 착수하여 신앙과 직장을 위한 센터 (the Center for Faith and Work)를 설립했다. 2003년에는 직업과 리더십, 그리고 직업과 관련한 결정 등에 대한 성경적 근거들을 탐구하기 위해 교육적 발견을 목적으로 하는 일련의 수업들을 개시했다. 그녀는 리디머 공동체와 뉴욕의 일터에 기여할 새롭고 다양한 사역들에 창의적으로 착수할 수 있는 사역 리더들을 찾아내고 양육하는 일에 집중한다. 그녀가 이미 사역들을 펼쳐놓은 직업 영역들에는 금융서비스, 교사, 변호사, 작가 등이 포함되어 있다.

요약

1989년 - 우정, 예배, 설교의 결합을 통해 세속적인 전문직 젊은이들에게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교회로 성장하기. (팀 켈러)

1991년 - 개개인의 삶 속에 기여하는 주된 방식으로서 필적할 만한 상대가 없는 소그룹들을 창출하는 셀 교회로 성장하기. (제프 화이트)

1994년 - 스스로 사역에 책임지도록 하는 권한을 스텝과 리더로 구성된 팀들에 부여함으로써 큰 조직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교회로 성장하기. (딕 카우프만)

1998년 - 교회개척 센터, 멀티사이트 예배 모델, 체계적인 훈련과 리더양성, 개발을 통해 하나의 교회에서 하나의 운동으로 발돋움하기. (테리 가이저)

출처

팀 켈러, 앨런 톰슨. 교회 개척자 매뉴얼. 리디머 교회 개척 센터,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