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 HELP LEADERS START CHURCHES IN GLOBAL CITIES
복음은 종교가 아니며, 비종교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과는 전혀 다른 무엇이다. 복음은 은혜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제3의 길이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극단적인 실수들을 피하고 복음을 정확하고 충성되게 전달할 수 있도록 독특하고도 균형 잡힌 방식으로 사역한다.
복음은 무엇인가? 1. 복음은 좋은 충고가 아니라 기쁜 소식이다. 2. 복음은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선포하는 기쁜 소식이다. 3. 복음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바로잡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무엇을 이루셨는가에 대한 소식이다. 복음과 복음의 결과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복음은 우리가 행하는 무엇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행해진 무엇이다. 우리가 행하는 많은 좋은 프로그램들이 복음을 대체해서는 안 된다. 복음은 사랑의 삶을 창조하는 소식이다. 그러나 사랑의 삶 그 자체가 복음은 아니다.
복음의 능력을 앗아가는 두 가지 적: (1) 종교, 율법주의, 도덕주의 (2) 비종교, 율법폐기주의, 상대주의, 실용주의. 상담, 제자훈련, 사회정의, 문화사역, 교리학습, 심지어 전도조차도 복음을 대체해서는 안 된다. 이 모든 사역은 복음의 결과로서 인식되어야 한다. 복음은 우리가 무엇을 성취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무엇이 성취됐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복음은 간단한 공식이 아니다. 복음은 만병통치약처럼 언제 어디서나 똑같이 제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결코 복음을 단일 표준 형태로 제시하지 않는다. 도리어 복음을 상당히 다양한 모습들로 표현한다. 공관복음이 나라(kingdom)라는 개념을 사용한다면 요한복음은 영생을 강조한다. 한편 사도바울은 칭의와 함께 법정 개념을 부각시킨다. 그러나 모든 성경 기자들의 신학적 핵심은 대속을 통한 구속이다. 우리는 성경을 알아감에 있어서 조직신학적 방법(공시적 접근)과 구속사적 방법(통시적 접근, 이야기 구조, 역사적 순서)을 병행해야 한다. 이 둘을 모두 활용할 수 있는 접근법은 신구약 성경을 관통하고 연결하는 주제들(intercanonical themes)을 중심으로 읽는 것이다.
“복음은 모든 문화와 개인의 특정한 소망이나 두려움, 우상들을 다룰 수 있는 초자연적인 역량을 갖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의 상황화(contextualization)를 할 필요가 있다." (89) “바울은 복음 내용을 다양한 방식(다양한 순서, 논증, 강조 등)으로 다양한 문화권의 사람들에게 전했다. 복음은 단 하나의(singular) 메시지이지만, 결코 단순한(simple) 메시지가 아니다.” (90) 복음은 우리 안에 새로운 삶을 창조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 변화를 가져온다.
왕이신 예수님은 종이 되어 섬기셨다. 예수님의 나라에서 가난한 자는 부한 자들보다 위에 있으며 먼저 된 사람이 나중 될 것이다. 복음은 세상의 방식들과 완전히 다른 새로운 종류의 섬김 공동체를 만들어 낸다. ⇨ ‘재침례파의 평화주의 교회’: 진실한 공동체, 구제, 영적 훈련, 계층 간의 화해
하나님 나라는 외적 측면(먹고 마시는 것)보다 내적 측면(의, 평강, 희락)을 강조한다. 복음은 도덕 준칙을 잘 치켜서 구원받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복음은 하나님이 나를 받아주시고 은혜로 값없이 사랑해주심을 통해 내면의 기쁨과 감사로 그분께 순종하는 삶을 살게 한다. ⇨ ‘복음적 은사주의 교회’: 개인의 회심, 은혜의 경험, 전도, 선교 강조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전히 임하지 않았다. 성령님은 미래 세대를 위한 보증이시며 마지막 때에 예수님은 처음 왔을 때에 시작한 것을 완성하기 위해 다시 오실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이미 그러나 아직’ 측면은 우리로 하여금 문화 정복에 대한 유토피아적, 승리주의적 비전을 가질 수 없게 하고 동시에 사회에 대해 비관적이거나 은둔할 수 없게 한다.” (97) ⇨ ‘주류 교회들,’ ‘아브라함 카이퍼를 따르는 개혁교회’: 도시와 이웃의 복지, 사회 참여, 문화변혁, 세계관-직업관
우리의 목적은 세 강조점을 모두 통합하는 것이다. “복음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초급 과정이 아니라 시작부터 완성까지 관통하는 것이다. 복음을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고, 살아가는 동안 복음을 점점 더 깊이 믿음으로써 우리의 마음과 감정과 인생의 모든 국면이 변화된다.” (99) 은혜 없는 진리(율법주의)는 진정한 진리가 아니며, 진리 없는 은혜(상대주의)는 진정한 은혜가 아니다.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이셨다(요 1:14). 율법주의는 믿음과 공로를 뒤섞어 칭의를 흐리게 하고, 율법폐기론은 순종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복음은 내가 얼마나 심각한 죄인인지 알게 함으로 율법폐기론을 치워버리고, 내가 무한히 많은 사랑을 받고 용납되었다는 것을 알게 함으로 율법주의를 물리친다.
영역 | 도덕주의자 | 상대주의자 | 복음 |
---|---|---|---|
1. 낙망과 우울 | “원칙대로 살지 않았군요” 행동을 고치려 함 | “자신을 용납하세요” 감정을 고양하려 함 | 하나님보다 더 소중한 것? 자신을 살피고 회개 |
2. 사랑과 인간관계 | 책임 공방, 비난 | 사랑받는 것이 곧 구원, 이기적, 계산적 사랑 | 희생과 헌신, 주님 안에서 자신의 가치 발견 |
3. 성 | 충동을 해소하는 최소한의 방법 | 생물학적, 물리적 욕구 | 그리스도의 자기 희생 반영, 전인격적책임 |
4. 가정 | 부모의 기대에 부합 | 가족에 대한 책임 회피 | 궁극적 아버지, 육적 부모의 인정이 다가 아님, 균형 (의존과 적대감) |
5. 자기 관리 | 상벌로 동기부여, ‘의지 기반 접근법’ | 자기 표출, 원하는 것, ‘감정 기반 접근법’ | 새로운 욕구와 열정 전인적 변화 |
6. 인종과 문화 | 다른 문화 판단, 우월주의, 자기 문화 우상화 | 모든 문화를 상대화함 | 모든 문화를 어느 정도 비판, 모든 사람을 환영, 도덕적 확신, 포용적 |
7. 전도 | 공격적 | 전도의 정당성 부인 | 관대함과 사랑에서 복음을 나누려는 열망 |
8. 인간의 권위 | 과도하게 순응 | 과도하게 순응 또는 무시하는 경향 | 거절 기준과 순종 동기 제공 |
9. 죄책감과 자아상 | 스스로 신이 되어 용서하지 않음, 요구는 많고 은혜는 없음 | 성취나 관계가 신이 되어 사람을 평가함 | 하나님은 용서하시는 유일한 신, 자신감과 함께 겸손을 줌 |
10. 기쁨과 유머 | 기쁨과 유머 파괴, 자신을 심각하게 생각함 | 비관주의로 흐르는 경향 희망 없는 세상 속의 냉소 | 구원은 영원토록 놀라운 기쁨이 됨, 희망 |
11. 다른 계층에 대한 태도 | 가난한 자를 책임감 없는 사람/실패자로 봄 | 가난한 자의 책임 축소, 구원이 필요한 존재 | 우월감이 아닌 겸손, 형제/자매로 존중 |
복음 부흥은 삶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재발견이다. ① 개인적 복음 회복은 죄와 은혜의 복음 교리를 삶 속에 실제로 경험하는 것이다. ② 공동체적 복음 회복(부흥)은 신자들 전체가 개인적 복음 회복을 함께 경험하는 것이다. 신자들은 일반적으로 머리로는 “예수님이 나를 받아주셨으니 바른 삶을 살아야지.”라고 말을 하지만 실제의 삶(마음과 행동)은 “나는 바른 삶을 살고 있으니 예수님이 나를 받아주신 거야”라고 말한다. 이러한 근본적인 신앙의 태도의 문제는 부흥으로 극복될 수 있다. 부흥은 성령님의 일반적 사역이 몇 배나 강하게 나타나는 때이며 회심의 역사들을 통해 필연적인 교회 성장이 따라온다. 종교(순종한다-그러므로 받아들여 진다)는 복음(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받아들여 졌다-그러므로 순종한다)이 아닌 모조품일 뿐이다. 그러므로 부흥이 반드시 필요하다. 복음에 이끌려 살아가는 사람일지라도 계속해서 자극받고 갱신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종교로 다시 미끄러지게 된다.
(1) 비종교: 하나님을 완전히 무시함 (할례받지 않은 사람) (2) 종교/도덕주의: 도덕적 의를 쌓아서 하나님의 보상을 요구함, 하나님의 주되심과 구원자 되심을 거부함, 자기의 구원을 위한 수단으로 하나님을 이용함 (육체에만 할례를 받은 사람) (3) 복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를 만들어주시는 것, 그 구원의 은혜에 반응하여 하나님의 법에 순복함 (마음에 할례받은 사람)
복음에서 종교로 옮겨 가는 것이 종교에서 복음으로 움직이는 것보다 훨씬 용이하다. 복음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조차 한편에선 계속해서 종교 모드로 돌아가곤 한다. 그래서 복음 부흥(renewal)이 필요하다. 설교자/복음전도자는 사람들이 자기 구원의 수단으로써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과 이미 이루어진 구원에 대한 감사로써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의 차이를 구분해 줘야 한다. 의도적으로 비종교나 종교와는 다른 제3의 길로서 설교해야 한다.
오늘날 포스트모던시대의 불신자들은 그런 ‘종교’를 거부하는 마음에서 기독교를 거부한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은 종교적인 사람이 되라는 요청으로 받아들인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들이 진짜 복음을 오해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사람들이 삶의 변화를 경험하고 권위주의에서 벗어나 기쁨과 능력과 열정 가운데 살아가도록 도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율법주의와 상대주의를 모두 해체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137)
도덕주의적 행동 변화는 처벌의 공포(어려움을 겪게 될 거예요)와 교만한 마음(더러운 거짓말쟁이가 될 거예요)으로 동기를 부여한다. 두려움과 교만함은 자기중심적 동기들이다. “자신의 행동을 바꾼다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는 논리를 가지고 있다. 바른 일을 하기 위해 자기 중심성을 자극하는 것은 마음의 주요 문제인 자기의식과 자기 몰입을 해결하지 못한다.
복음적 행동 변화는 우리가 “성령에 의해” 진정으로 복음을 믿을 때, 복음에 대한 영적인 상기를 통해 우리의 마음은 변하게 된다.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자신을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보게 되며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일들을 토대로 정체성을 갖게 된다. 복음은 도덕적 행동 변화의 연료가 되는 교만과 두려움을 모두 제거한다. 복음은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싶은 마음 가운데 우리가 바른 일을 행하도록 이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과 하나님의 돌보심을 확신할 때에 돈에 대한 염려와 정욕을 이길 힘을 갖게 된다. 그것은 단순한 노력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의미를 깊이 이해하고 이로 말미암아 마음에 일어나는 변화들을 삶으로 살아낼 때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 목양, 상담, 교훈, 제자훈련의 목적은 사람들에게 복음 신앙의 실제적인 의미를 보여주는 것이다.” (146)
종교 | 복음 | |
---|---|---|
나는 순종한다. 그러므로 용납받는다. | 나는 용납 받았다. 그러므로 나는 순종한다. | |
순종의 동기 | 두려움, 불안 | 감사와 기쁨 |
순종의 이유 | 무엇을 받기 위해서 | 하나님을 더 알기 위해, 하나님을 기뻐하고 닮아가려고 |
상황이 잘못될 때 | 하나님이 분노한다. 좋은 사람은 편안한 삶을 산다. | 씨름한다. 훈련을 허락하신 하나님께서 시련 속에서도 사랑을 베푸실 것을 안다. |
비난 당할 때 | 격노, 무너짐, 좋은 사람의 자아상에 집착함 | 씨름한다. 그러나 나의 정체성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 |
기도 생활 | 간구, 필요할 때만 열심히, 상황을 통제하는 것이 목적 | 찬양과 경배, 기도의 주된 목적은 하나님과 교제 |
자아상 | 양극단: 자신감/교만, 자신감 상실/패배자 | 도덕적 성취에 근거하지 않음, 죄인이며 동시에 용납된 존재, 겸손 |
정체성과 자존감 | 얼마나 열심히 사느냐에 달림, 규범적이지 않거나 게으른 사람 무시, 스스로 우월감을 가짐 | 나를 포함한 원수들을 위해 죽으신 분에 근거, 오직 은혜,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말싸움을 이겨야 한다는 내적 필요 없음 |
나의 조건/성취에 의한 영적인 용납을 생각하므로 마음은 우상들을 생산한다. 그것들(재능, 윤리, 개인훈련, 사회적 지위 등)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것들이 나의 주된 희망, 의미, 행복, 안정, 중요성이 된다. | 내 삶에 많은 좋은 것들이 있지만 어떤 것도 나에게 궁극적인 것들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좋은 것들이 위협받거나 상실될 때, 그로 말미암아 겪는 불안, 분노, 절망에 제한이 있다. |
사람들이 복음을 믿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닫도록 도와줄 성경적이면서 실제적인 방법은 그들에게 우상숭배의 본성을 가르치는 것이다. 우리가 인정, 기쁨, 가치, 소망, 안전 등을 위해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 이상으로 더 바라보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건 우리의 신(우상)이 된다. 예를 들어 가정, 성공, 일, 경력, 연애, 재능, 심지어 복음 사역도 이것들이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가장 큰 의미와 기쁨이 된다면 그것이 우상이다. 우리는 이 우상들이 위협을 받을 때 지나친 걱정이나 분노, 낙담하게 된다. 우상숭배는 다른 모든 죄의 뿌리가 된다. “하나님을 전혀 신뢰하지 않으며, 오직 다른 무엇을 바라기 때문에 그의 은총만 구하는 이들은 이 계명을 지키지 않으며, 진정으로 우상숭배를 할 뿐이다. 그들이 십계명의 다른 계명들을 지킨다고 할지라도 그렇다.” (루터, 152)
결국, 모든 죄의 뿌리는 예수님 만이 우리의 칭의와 의와 구원이 되신다는 복음을 믿지 않는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대신하여 ‘자기 구원’을 의지하는 대체물을 갖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여러 방식으로 우상숭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에는 결코 변화되지 않는다. 그러기에 설교하고 상담하는 사람들은 내재하는 우상들에 대해 항상 말하고 가르쳐야 한다. 이를 통해 도덕주의적 방식을 통해 변화를 가려오려는 시도들을 미리 예방하고 참된 변화를 기대할 수 있게 된다.
성령님께서 개인들과 회중의 삶에 영속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실질적인 방법과 수단들:
(1) 각별한 기도: 연합해서, 지속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중심으로 드리는 기도. 회개와 겸손을 위한 은혜의 간구, 교회 회복에 대한 열정, 잃은 자를 위한 연민, 하나님을 알려는 열심과 그 영광을 맛보려는 갈망 (2) 복음의 재발견: 잘못된 교리를 바로 잡는 일뿐만 아니라, 바른 교리를 고수하면서도 진정한 회개, 기쁨, 영적 성장이 없는 상황(죽은 전통, 영적 무기력증)에서 생명력을 다시 회복하는 것 (3) 복음의 적용: ① 설교를 통한 복음 회복 ② 복음을 다른 이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평신도 지도자들을 훈련 ③ 소그룹 (성경공부, 기도, 교제 모임) ④ 비공식적인 대화 ⑤ 사역자들의 목양적 상담(지식과 감정의 균형 필요) (4) 복음 혁신: 부흥은 주로 일상적인 은혜의 수단들(설교, 목양, 예배, 기도)을 통해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흥의 역사 속에서는 복음을 소통하는 어떤 혁신적인 방법들을 통해 나타나기도 한다. 부흥은 결코 어떤 방법의 똑같은 반복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성령님께서 특정한 순간에 사용하시는 복음 선포의 새로운 방식들을 계속해서 찾아야 한다.
1. 종교와 복음을 구분하는 설교를 하라. 2. 은혜의 풍성함을 전하기 위해 거룩함(심판, 의)과 하나님의 사랑(자비, 은혜)을 모두 설교하라. 3. 진리에 대해 명확하면서도 실제적으로 설교하라. “설교의 첫째 되고 가장 중요한 목적은 감동을 주는 것이다. 그것은 중요한 순간에 감명을 주는 것이며, 순서 정연하게 기억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마음에 감동을 주는 것이다. 애초부터 설교는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설교자로서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정보의 전달자가 아니다. 설교의 핵심은 그런 지식이 살아있게 하는 것이다.” (마틴 로이드 존스, 163) 4.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 5.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모두에게 동시에 설교하라.
“복음 부흥의 역동성이 제자리를 잡지 못하면, 교인의 숫자는 증가 할 수 있지만, 활력 면에서는 장담할 수 없다. 성장은 하겠지만 지속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진정한 열매는 맺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교회가 성장하는 일이 생기더라도, 지역 사회 질서에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다.” (172-173) 우리는 부흥을 만들어 낼 수 없다. 부흥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며 우리는 단지 준비만 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 가운데 “눈물로 씨를 뿌리는 일”을 계속해야 한다.
존 스토트는 기독교의 소통을 성경과 현대 세계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으로 비유했다. 우리는 성경 본문을 해석하거나 문화(청자의 상황)를 이해하는 것도 언제나 완벽하지 않고 부분적으로 틀리기도 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와 다른 관점(견해)를 가진 문화 속의 사람들에게 귀를 기울임으로 우리가 간과하거나 오해하고 있는 부분들에 대해 수정해나가야 한다. 우리는 다른 문화와의 교류를 통해서 이전에는 전혀 던지지 않았을 질문들을 던지게 되고 전에는 명료하게 볼 수 없었던 많은 것들을 볼 수 있게 된다. 이같이 다른 관점에서 성경 본문을 보는 것은 우리가 보지 못했던 진리의 다른 면들을 볼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우리는 성경의 어떤 부분은 더 중요하게 여기고 나머지 부분은 사소하게 여기거나 무시하는 태도(‘정경 안의 정경’)와 그러한 우리의 자연스러운 경향을 경계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위치한 사회문화적 지점에 따라서 성경의 가르침을 축소하거나, 특정 부분을 과장하게 된다. 우리는 새로운 문화와의 접촉을 통해 이러한 경향들에 경각심을 일으킬 수 있다.
“성경이 비그리스도인 문화에 의해 수정될 수는 없지만, 개별적인 그리스도인들과 그들의 성경에 대한 문화적 이해들은 수정될 수 있고 수정되어야만 한다.” (218) “우리가 문화와 상호작용하는 것은 성경에 대한 이해를 더 좋은 쪽으로 적용시키며 변화시키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지만 최종적으로 성경이 문화와 우리의 인식에 대한 궁극적인 권위를 가진다.” (221) 우리는 성경의 한 부분만 인정하는 가운데 문화의 요구에 따라 성경의 내용을 취사선택해서는 안 된다.
문화적 근본주의는 성경을 문화와 상관없이 본다. 성경을 보편적인 용어로 읽고 신학을 표현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한편, 문화적 상대주의는 “성경이 현대 상황의 개념으로 설명되고 적용되지 않은 한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인식해야 한다. 각각의 문화들은 진리의 어떤 부분은 쉽게 이해하지만 다른 부분은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
우상숭배로서의 죄: 불법으로서의 죄 개념을 우상숭배로서의 죄 개념으로 설명할 때 포스트모던한 사람들은 더 쉽게 죄 개념을 이해하고 인정하였다. 어거스틴도 ‘고장난 사랑’에 대해 이야기했다. 팀 켈러는 죄를 “여러분의 삶의 의미를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 위에 세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우상숭배의 개념들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두려움, 집착, 중독, 도덕의 결여, 타인에 대한 시기심, 분노 등을 이해하게 도와준다. 모든 사람은 무언가를 반드시 예배하게 되어있다.
“죄를 단순히 법을 어긴 것이 아니라, 대상이 잘못된 사랑이라 설명하는 것은 현대 문화의 많은 이들에게 보다 더욱 설득력이 있다. 물론, 죄와 은혜에 대한 완전한 성경적 묘사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법과 권위에 대한 우리의 반역이 나타나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를 우상숭배와 대상이 잘못된 사랑으로 확신한다면, 죄의 결과 중 하나가 하나님에 대한 적대감을 부인하면서 살아가는 것임을 좀 더 쉽게 확신시킬 수 있다.” (274)
서구 문화의 급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좋은 접촉점이며 공격점 ① 성의 상품화(소비자로서 의무를 회피함, 만성적 외로움, 그러나 성 윤리가 공동체의 유익이라는 신념으로 설명될 수 있다.) ② 인권의 문제(인권/정의에 대한 신념은 신의 창조를 근거로 힘을 얻을 수 있다.) ③ 문화적 희망의 상실(종교, 국가 같은 권위를 부인했지만 인생의 의미와 미래 희망을 상실한 시대가 되었다.)
청중을 위로하며 호소하기: 청중을 단순히 책망하거나 비판하는 대신 그들의 방식이 결국에는 파멸로 이르는 길임을 보여 줘야 한다. 그리고 결국 그들이 그토록 찾던 것이 그리스도임을 제시해야 한다. 그들의 ‘이야기’가 예수님 안에서만 ‘해피엔딩’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줘야 한다. 그리스도가 답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성경의 다양한 복음 주제들을 연결해야 한다.
속죄언어/문법: 서로의 방식들이 상호보완적이다. ① 전쟁터 언어(악의 권세를 이기심) ② 시장의 언어(노예를 값 주고 사심) ③ 추방의 언어(예수님이 공동체를 떠나서 우리를 고향으로 이끄심) ④ 성전의 언어(희생제물이 되심, 깨끗하게 하심) ⑤ 법정의 언어(대신 처벌 받으심, 죄책감을 제거하심) ⇨ 결국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행하신다는 면에서 속죄의 핵심(대속)이 발견된다. 현대인들은 현실에서 채워지지 않는 인간의 깊은 동경(해피엔딩)을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구원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 “복음은 인간 마음에 줄 수 있는 가장 깊은 위로이다.” (283)
먼저, 전도하려는 대상을 이해해야 한다. 그들과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그들의 희망, 두려움, 반대나 신념들을 표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진리는 진공 속에서 선포될 수 없다. 진리는 특정한 사람들의 질문들에 대한 답변으로 선포되어야 한다.” (257)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갖고 경청하는 것부터 시작하라. 어떻게 문화 속으로 들어갈 것인가? 그 지역의 문화와 역사를 배운다. 지역 사람들을 만나고 경청하며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다.
우리는 충성되고 공교하게 복음을 상황화하여 복음의 진리가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과 세계 가운데 들어가도록 해야 한다. “건전한 상황화 잘 이루어 지면, 사람들은 자신들의 인생 이야기가 그리스도 안에서만 해피엔딩이 됨을 발견하게 된다.” (191) 효과적인 상황화는 넓은 문화 즉 세상의 모든 측면을 포괄한다. 단지 외형적인 관습이나 행동을 변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문화의 가장 안쪽에 있는 세계관과 가치관에 접근하는 것이다. “상황화는 단순히 성경 교리의 실천적인 적용에 대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에서 지배적 힘을 발휘하는 사회적 구조와 삶의 방식, 현실과 연결되는 개념들로 교리를 번역하는 것이다.” (데이비드 웰스, 192)
문화의 가치가 성경의 권위보다 더 높은 우선순위를 차지할 때 ‘균형 잡힌 상황화’에 실패하게 된다. 역사적으로 복음의 상황화는 종교적 혼합주의의 구실을 해왔으며 혼합주의는 복음의 ‘결정적이고 기본적인 요소들’을 잃어버릴 때 일어난다. 모든 문화마다 보다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성경 본문들이 있고, 간과하기 쉬운 본문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성경 전부에 귀 기울이지 않을 때 혼합주의가 발생한다.
상황화의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반드시 ‘균형 잡힌 상황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인간이 설명하려는 어떤 진리도 문화를 뛰어넘어 분명히 표현되는 것은 전혀 없다. 그렇게 표현되는 진리가 문화를 초월하지 못한다는 뜻은 아니다.” (D. A. 카슨, 198) 초문화적이고 보편적인 단일한 복음 제시 방법이 없다는 사실은 상황화의 불가피성을 말해준다. 우리가 복음을 (특정 언어와 문화 속의 사람들에게) 표현하는 순간 이미 상황화는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모든 복음 사역과 설교는 이미 특정 문화에 깊이 적응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황화를 ‘계획적으로’ 해야 한다. 우리는 주류에게만 편안하게 적용되는 상황화에 고정되어 있을 수도 있다. 상황화를 고려하지 않으면 우리는 사역에 있어서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 성경적이고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무의식중에 생각하며 쉽게 고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목회자들이 가장 많이 저지르는 실수 가운데 하나는 개인적으로 영향을 끼친 방법이나 프로그램을 무조건 반복하는 것이다.” (206)
모든 사회는 그 사회가 최고의 가치라고 여기는 것을 섬기도록 요구한다. 그런 면에서 어떤 문화도 중립적이지 않다. 모든 문화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우상)을 의지하여 자신을 정당화하고 구원하려 한다. 일반 계시(은총)을 통해 모든 인간 문화는 죄에도 불구하고 부분적으로 하나님의 진리(지혜, 아름다움)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문화들에 악과 선의 요소가 있다는 것을 알고, 왜곡된 것을 살피고 분별하는 가운데 문화의 영감과 창작을 즐길 줄도 알아야 한다.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우리는 복음 사역을 할 때에 문화적으로 고정된 개념들을 가진 사람들에게 불필요하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우리의 태도나 행동을 살필 필요가 있다. “모든 문화 안에서 복음 전도자나 교회 개척자, 그리고 기독교 증언자들이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유연해지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복음이 단순히 문화적 수준에서 불필요하게 이질적으로 보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 (카슨, 235) 우리는 불필요한 스캔들을 제거함으로써 복음이 죄인들에게 주는 바른 스캔들을 일으키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적절한 상황화의 동기다. “건전한 상황화는 이기심을 극복하는 표지가 된다.” (236)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표적)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복음은 각 문화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기도 하지만 반면,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다른 방식으로 보게 만든다. (참된 능력, 참된 지혜) 바울은 여러 다른 문화의 지역에서 다른 청중들을 대상으로 설교하면서 상황화의 원리를 잘 보여준다.
바울의 다양한 방식의 설교 중에도 여전히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1. 청중에 따라 인용하는 권위, 내용, 순서, 강조점을 달리한다. 2. 모든 복음 제시에서 인식론적 도전(하나님, 세상에 대해)과 죄와 타락한 상황에 대한 개인적인 도전이 있다. 3. 죄의 문제에 대한 답과 해결책으로써 (용어와 접근법은 다를지라도) 그리스도를 선포한다. 바울 복음 안에는 ① 하나님에 대한 진리 ② 죄와 구원의 필요성 ③ 예수님에 대한 진리 ④ 회개와 믿음으로 반응하라는 부름이 있다. 여러 복음 전도 형태 중 어느 한 가지가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성경은(예수님의 사역에서부터) 다양한 형태의 복음 사역이 있음을 보여준다.
1. 심판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2. 죄책감과 수치심에서 해방되려는 열망으로 3. 진리가 지닌 매력에 감사해서 ⇨ ‘십자가의 지혜가 참된 지혜’ 4. 채워지지 않는 실존적 열망을 채우기 위해 ⇨ ‘생수’ ‘참된 기쁨, 만족’ 5. 문제(질병 등) 해결의 도움을 받고자 ⇨ 궁극적인 문제의 해결자 6. 사랑을 받기 원하는 마음에서 ⇨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
설교자와 전도자가 가지는 큰 위험 중 하나는 위 동기부여 방법 중 한 개만 강조하는 것이다. 본인이 먼저 그 한 가지에 ‘은혜’를 받았을 것인데 그것을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고/되어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우리가 만일 종교의 기준으로 산다면 교만해지거나 열등감에 빠질 것이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를 겸손하고 담대하게 만든다. 오직 복음만이 우리에게 필요한 균형을 가능하게 한다. "교회의 형태와 관련하여 신약성경이 명하지 않는 것은 어떤 것이든지 성령의 지도아래 특정 시간과 장소에서 자유롭게 정할 수 있다.” (프랜시스 쉐퍼, 249)
균형 잡힌 상황화와 성공적인 전도를 위해 우리는 문화를 존중하고 공감하면서 ①문화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또한 문화와 성경적 진리가 충돌하는 곳에서 ②문화에 맞서야 한다. 두 가지를 균형 있게 해야 한다. 문화 속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메시지를 외치는 일은 담대하게 보일지는 몰라도 복음을 영화롭게 하는 데는 실패하는 것이다.
(1) 그리스도인들은 도시에 대해 감사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도시 생활을 진실 되게 사랑하고, 거기에서 에너지를 얻어라. 도시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들을 조심하라.
(2)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사는 곳에 역동적인 대항문화(counterculture)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특정한 종류의 공동체로 살아야 한다. 우리는 섬김에 기초한 ‘대안 도시’ ‘대안 문화’가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성, 돈, 권력이 어떻게 바르게 사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어야 하며 계급과 인종이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어울릴 수 있는지 보여주어야 한다. 도시는 다양성으로 인해 복음의 고유한 공동체의 모습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 줄 수 있다.
(3) 그리스도인들은 도시의 전체적인 유익을 위해 깊이 헌신된 공동체여야 한다. 대항문화를 형성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되고 더 나아가서 도시 전체에 유익을 위해 섬기는 일에 헌신해야 한다. 특별히 젊은 그리스도인들은 도시의 소비 지향적인 태도에 현혹되고 동참해서는 안 된다. 도시의 편안함을 누리기 위해 도시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도시를 섬기기 위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도시에서 살기를 추구해야 한다. 단지 위대한 교회를 만들기 위해 도시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자원들을 사용해서 위대하고 발전하는 도시를 추구해야 한다. 우리는 엄밀히 말해서 이것을 ‘교회 성장’ 모델이 아니라 ‘도시 성장’ 사역 모델이라고 부른다. 이는 센터처치의 신학적 비전에서 나오는 사역의 자세이다.” (365)
(1) 도시의 감수성을 존중한다. 도시적 감수성과 보조를 맞추어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필요하다. 도시는 역설적이고, 까다롭고, 다양성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으며, 모호성과 무질서에 대해 관용적이다. 도시 사람들은 편안함과 규율보다는 강렬함과 연결성을 더 중시하며 소통 방식에 세련됨을 추구하고, 과도한 꾸밈을 피한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정보력이 있고, 자기감정을 잘 표현하며, 창의적이고, 자기주장이 강하다. 그들은 논리적이면서도 사려 깊은 의견을 존중한다.
(2) 문화적 차이들에 대해 각별한 민감성을 가진다. 한 지역 안의 여러 그룹들이 가지는 특성들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하며 그 차이에 대해서 존중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어느 교회도 모든 종류의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 없음을 알아야 하며, 또한 사역에 대한 문화 중립적인 방법이 존재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즉 우리가 사역에 있어 어떤 방식을 선택하는 순간 우리는 누군가에게는 더 접근하기 방법을 선택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능한 한 폭넓은 사람들에게 다가갈 방법들을 선택해 나가야 한다. 그 좋은 방법 중 하나는 인종적으로 다양한 지도자들을 앞세우는 것이다.
(3) 이웃과 정의에 대해 헌신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적극적으로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하며, 지역 사회(도시 전체)가 더욱 건강해지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웃들에게 선을 행하는 일에 헌신이 필요하다.
(4) 신앙과 직업을 통합한다. 전통적인 교회들은 개인 경건에 대해 강조하는 만큼 삶의 모든 영역에서의 적용과 실천에 대해 깊이 있는 이해를 제공해주지 못했다.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이 날마다 직장에서 대면하는 윤리적/신학적 이슈들에 대한 실제적인 도움을 주어야 한다.
(5) 전도에 대해 복합적 접근을 한다. 이민자 교회나 기독교 문화 프로그램을 제공하는(‘기독교 하위문화’의 필요를 채워주는) 교회들은 전도 없이도 성장할 수 있다. 그러나 전도 없는 교회 성장으로는 도시에 더 깊이 다가서지는 못한다. 하나의 ‘대단한’ 전도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다양한 사람들에게 맞는 전도 방법을 창조적으로 찾고 시도해야 한다.
(6) 도시 사람들에게 매력적이면서도 도전적인 설교를 한다. 도시의 특성상 도시 교회의 청중 안에는 비신자가 섞여 있을 가능성이 더욱 크다. 신자와 비신자에게 동시에 설교하는 방법이 있다. ① 예수님의 사역에 근거한 정신적 권면을 담은 설교를 하라. ② 회중이 가진 다양한 전제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라. (예,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음) ③ 의심하는 사람들을 배려하라(유 1:22). ④ 다양한 집단들에게 직접적으로 말하라. ⑤ 당신의 태도에 주의하라. (너무 인위적이지 않게, 너무 절제되거나 너무 과장되지 않게) ⑥ 청중이 알고 있는 책, 잡지, 블로그, 영화, 연극 등에 대해, 그리고 도시의 일상적인 경험에 대해 깊은 친숙함을 보여주라.
(7) 예술과 창조성을 중시한다. 예술가는 갈수록 많아지며 압도적으로 대도시에 몰리고 있다. 이에 교회들은 예배와 사역의 예술적 표현에 있어서 높은 표준을 가짐으로 평균적인 도시 거주민들과의 문화적 간격을 좁혀야 한다. 교회는 예술가들을 유요한 기술을 가진 사람들을 대하고 이용하려고만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을 존중하며 그들과 협력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백성이 도시의 전략적 강력함을 깨닫고 받아들이기를 촉구한다. 그리고 지구의 모든 위도와 경도에 있는 교회들이, 도시 안에 있으라는 또는 도시를 섬기라는 긴급한 부르심에 반응하기를 바란다. 도시 비전은 하나님이 도시에 대해 갖고 계신 창조의 의도를 이해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백성이 인간의 도시 안에서 하나님의 도시 시민이 되게 하는 것이다.” (379)
(1) 문화 변화에 대한 태도: 비관적인가 아니면 낙관적인가? 각각의 모델은 문화 변화에 대해 지나치게 낙관적이든 지나치게 비관적인 경향이 있다. 문화는 반드시 바뀔 수 있다. 그러나 낙관주의적 성향의 그룹은 문화가 어떻게 변화될 수 있는지에 대해 제한된 이해를 가지고 부분적인 면들을 지나치게 강조한다. “문화적 변화는 주로 외부에 있는 엘리트들을 통해 일어난다. 대개는 젊은이들과 여성들이 해당되는데 최고 권위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낮은 층이거나 영향력이 덜하거나 새로운 기구에 있는 이들이다. 그 외에도 공통의 대의를 가진 네트워크들이 서로 다른 문화 영역들에서 겹칠 때 문화 변화가 촉진된다.” (472)
(2) 문화의 본성에 대한 이해: 문화는 구원 가능한가 아니면 근본적으로 타락한 것인가? 카슨은 각각의 모델들이 성경 이야기의 흐름 또는 거대담론의 충만함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도리어 네개의 모델을 종합적으로 살펴볼 때 그 흐름이 잘 요약된다.
변혁주의자 모델 | ►강조점: 죄와 타락의 영향, 신앙 vs. 불신앙, 문화의 우상 ▻약점: 승리주의적, 비신자들의 기여를 인정 못한다. |
---|---|
적절성 모델 | ►강조점: 피조 세계의 회복, 열방의 치유, 죽음으로부터의 부활 ▻약점: 하나님 나라의 ‘이미’와 ‘아직’ & 구속의 특별성을 간과한다. |
반문화주의자 모델 | ►강조점: 구속의 형태-새 백성, 새 인류를 통한 그리스도의 통치 ▻약점: 교회 안의 죄와 세상의 일반은총을 간과한다. |
두 왕국 모델 | ►강조점: 창조 세계의 선함,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 일반은총 ▻약점: 세상 삶에서 성경과 복음의 필요성과 실제성을 간과한다. |
여러 모델 중에 한 개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 다섯 가지 모델 ① 제도로서의 교회: 교리, 신학, 안수받은 사역 ② 신비적 공동체로서의 교회: 유기적 공동체와 모임 ③ 성례로서의 교회: 예배 ④ 전달자로서의 교회: 전도와 설교 ⑤ 종으로서의 교회: 사회정의
팀 켈러는 다음 장에서 “교회 개척”을 다섯 번째 접점으로 추가한다. (749) (1) 사람들을 하나님께 연결하는 것 (전도와 예배를 통해서) (2) 사람들을 서로에게 연결하는 것 (공동체와 제자도를 통해서) (3) 사람들을 도시에 연결하는 것 (자비와 정의를 통해서) (4) 사람들을 문화에 연결하는 것 (신앙과 직업의 통합을 통해서)
전도적 예배의 성경적 근거는 고린도전서 14:24-25과 사도행전 2장에서 관찰될 수 있다(632-634). 이 관찰을 통해 다음 세 가지를 발견할 수 있다. ① 비신자들이 그리스도인의 예배에 참여할 것이 기대된다. ② 비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의 찬양이 이해 가능해야 한다. ③ 비신자들은 이해 가능한 예배를 통해서 책망을 받거나 회심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우리가 예배하는 것을 듣기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에게 단순히 예배할 뿐만 아니라 ‘나라들 앞에서’ 찬송을 부르라고 하신다.” (635)
(1) 비신자들을 예배에 포함시켜라. 비신자들을 예배에 포함(초대)하는 것이 첫 번째가 아니라 두 번째여야 한다. 먼저는 그들이 이해할 만한 (전도적인) 예배를 만들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교회의 예배가 자신의 친구들에게 끌리는 예배인지 아닌지를 안다. 그러기에 더욱 교회에 초대하지 않고 기대하지도 않는다.
(2) 비신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예배를 만들라. 비신자들이 “편안하게” 느낄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라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전도적 예배를 통해 죄를 깨닫고, 마음의 비밀이 드러나며, 놀라고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① 일상 언어로 예배하고 설교하려고 노력하라: 전문용어 피하기, 정중함, 공감, 선행질문 ② 예배의 흐름에 따라 설명을 제공하라: 예배의 각 순서를 (짧게) 설명하라. ③ 비신자들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며 환영하라: “여러분들 중에 믿지 않는 분들께 말씀드립니다.” “신앙은 삶의 자유를 빼앗는 것 같습니다.” ④ 수준 있는 예술을 예배에 사용하도록 하라: 음악, 시각적 미적 요소들, 전문 연주자 ⑤ 자비와 정의의 실천을 고취하라: 실천적 사역을 위한 헌금 강조, 구제헌금 ⑥ 복음을 분명하게 볼 수 있도록 성례를 시행하라: 세례는 간증의 기회, 성찬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에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다. ⑦ 은혜를 설교하라: 복음에 대한 오해를 풀어주라. 복음은 신자들의 성장을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그리스도인과 비신자가 모두 반복적으로 들어야 할 한 가지 기본적인 메시지가 있다. 그것은 은혜의 복음이다. 복음의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는 신자를 성장하게 하고 비신자를 돌아오게 한다." (642)
(3) 사람들을 결신으로 이끌라. 1) 예배 가운데 결단하도록 이끌 수 있다. 성찬식 때 초청의 권면을 한다. 혹은 설교 후 침묵의 시간, 연주 시간에 기도할 수 있도록 한다. 2) 예배 후에 결신으로 초청한다. 다음 주를 기다리게 하는 것보다 (강요하거나 조급하게 대하지 않으면서도) 즉각적인 반응을 해줘야 한다. 개인적으로 강단 앞으로 나 온 사람들의 질문에 답해주기, 예배 후 바로 모임을 만드는 등의 방법이 있다. 평신도 사역자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우리는 개인의 회심과 경험을 강조하던 “개인들”의 부흥주의에서 머무르지 말고 공동체적 경건을 함께 강조하는 균형 잡힌 “교회 부흥주의” 기대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오늘날 교회 사역에서 부흥주의의 통찰과 교회의 실천(경건)을 결합할 수 있을까? ① 회심을 위해 설교하되 기존의 성도들을 존중하라. ② 등록교인이 되기 위한 후보들을 조사하라. ③ 교리교육을 회복하라. ④ 찾는 이들은 과정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인정하라. 전도적 예배와 신학적으로 풍성한(교육적) 예배의 두 장점을 살려서 통합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⑤ 세례 교육과 등록교인 허입은 훨씬 교육적이며 훨씬 중요한 예배의 일부임을 깨달아라. ⑥ 성찬에 대한 기대를 영적 준비를 위한 도약대로 사용하라.
(1) 책임감을 갖고 일하기: 직업에 관련된 영적 양육이 필요하다. 도시 문화의 직장환경(주말/장시간/주야간근무)에서 어떻게 양육을 제공할 것인가? 도덕적 이슈, 윤리적 난제, 유혹, 실망 거리,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어려움들을 구체적으로 다룰 수 있는 모임과 관계들을 어떻게 제공할 것인가?
(2) 구별성을 갖고 일하기: 세계관 형성과 훈련이 필요하다. 전혀 다른 세계관을 가진 동료들 사이에서 어떻게 달라야 하는가? 복음이 신자들이 하는 일들을 어떻게 구별되게 하는가? 일터에서 어떻게 주님의 주재권을 실행할 수 있는가? 이러한 실천은 의도적인 “학습 공동체”를 통해서 흘러나와야 한다.
(3) 탁월성 있게 일하기: 멘토링 및 문화 생산이 필요하다. 서로 지지하며 도와야 한다. 어느 분야의 경험자가 시간을 내어 도울 수 있다. 협력적 사업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
교회의 통합적 사역의 핵심적인 영역은 신자들이 복음 예술, 사업, 정부, 미디어, 여가, 그리고 학문에 끼치는 의미를 끝까지 생각하도록 돕는 것이다. 우리는 업무에서의 탁월성이 우리의 신앙에 대한 신뢰성을 획득하기 위해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701)
(1) 관계적 진실성이 있는 신자들: “메시지가 맥락화되는 것은 그것이 새로운 언어나 문화 속으로 변환되어서 이해 가능하면서도 이전의 언어와 문화에서 가지는 원래 의미와 특성을 유지할 때에만 가능하다.” (588)
1) 이웃과 같아야 한다. 같은 문화 속에 함께 살며 모든 면에서 비슷한 수준을 가져야 한다. 탁월성에 있어서도 이웃과 같아야 한다. 비그리스도인이 생각할 때에 그리스도인도 세상 속에 함께 살고 있으며 자신들을 이해하고 있다고 받아들이게 된다.
2) 이웃과 달라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정직하고 양심적이며 투명하고 공정해야 한다. 궁핍한 자에게 관대함을 보이며 검소하고 친절하며, 집에 초청하고 베푸는 것을 즐거워해야 한다. 동정과 용서, 화해를 추구하며 반문화적 가치를 실천해야 한다. 또한 실패와 실망 중에서도 침착하며 공동체의 공익을 추구하는 자임을 보여주어야 한다.
3) 이웃에 참여해야 한다. 정기적으로 같은 장소(가게)를 들린다. 주민모임, 취미활동, 학교 /지역행사, 봉사 등에 참여한다. 또한 동료와 친구들과 함께 운동을 하거나 문화 활동을 즐겨라. 혹은 식사 초대를 하거나 토론 그룹을 조직하라.
위의 세 가지 요소들-같음, 다름, 참여함-은 그리스도인의 관계적 진실성의 기초를 이룬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으면서 비그리스도인들의 영적 궁핍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는다(조화/융화 접근법, the blend-in approach). ⇨ 용기가 부족하다. 손해 보는 것을 두려워한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밝히지만 비그리스도인들과의 관계는 피상적이며 그저 기독교적 문화와 활동에만 참여한다(기독교 거품 접근법, the Christian Bubble approach). ⇨ 주변 사람들에게 감정적, 사회적, 재정적, 신체적 헌신을 하지 않는다.
위의 두 종류의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는 비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와 그리스도인에 대한 왜곡된 이해와 고정관념들이 수정될 수 없다. 결국 복음 전도의 길이 더 멀어질 뿐이다. 초대교회에 있어서 교회는 비그리스도인들에게 “매력적”이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사랑과 진실성을 보며 그들의 삶의 원천인 복음에 이끌렸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더 외롭고 더 경쟁적인 환경 속에서 참된 사랑과 희망을 찾기에 갈급해있다. 교회는 그것을 보여줄 수 있으며 그 원천으로 이끌어줄 수 있어야 한다.
(2) 목양적 지원: 교회 지도자들은 평신도 사역의 중요성을 인식하며 의도적으로 사람들을 준비시키며 격려해야 한다. 공식적으로만이 아니라 비공식적인 교육과 지원, 대화를 통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 목회자들은 평신도 사역자들의 삶에 개인적으로 동참해야 하며 그들에게 모범이 되어 주어야 한다. (관계적 진실성과 관계적 사역을 보여주어야 한다.)
(3) 안전한 공간
평신도들은 교회가 지원하는 다양한 종류의 행사, 모임, 활동들 가운데서 비신자들이 훨씬 직접적으로 기독교와 복음에 노출이 될 때 격려와 방향 제시를 받을 수 있게 된다. 그러한 행사/모임/활동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너무 신학적, 교회적 특성을 나타내어 새로 온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해서는 안 된다. 불필요한 장애물을 놓아서 새로 온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
조직(organization)은 제도적(institutional) 성격과 운동 역동성 모두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제도는 규칙과 정책을 통해 안정적인 패턴을 만들어 내며 기존의 권위에 대한 순종에 의해 움직인다. 반면 운동은 ① 비전 ② 희생적 헌신(내재적 보상) ③ 유연성(구성원 밖의 사람들에 대한) ④ 자발성(새로운 아이디어와 지도자를 내부로부터 키워냄)으로 역동성을 만들어 낸다. 교회에 운동 역동성이 있는지 없는지 여부는 희생하는 문화가 있는지 없는지를 보면 된다. 만약 교회의 상위 지도자들만 희생하고 있다면 운동성이 없다는 뜻이다.
교회는 분명 제도여야 하지만 동시에 운동이어야 한다. 생명력 있는 유기체이면서 동시에 구조화된 조직체여야 한다.
(1) 비전과 신념이 하나 됨을 만든다. 교회 비전은 복음과 교회 사역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을 어떻게 상황화하여 표현할 것이냐에 대한 것이다. 비전은 성경적 부르심의 다양한 국면을 강조하면서도 지역 교회가 속해 있는 특정 문화의 사람들에게 명확하고 설득력 있게 제시되어야 한다. 이러한 비전에 헌신을 요구하는 것은 결코 강압적으로 될 수 없다. 오직 비전과 헌신을 가진 지도자만이 다른 사람들 속에 희생적 정신을 불붙일 수 있다.
(2) 화합에 대한 강조가 협력을 창조한다. 비전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그 성취를 보기 원하여 비전에 동참하여 협력하기를 원한다. 심지어 선호, 기질, 이차적 신념이 다른 사람들도 일차적 신념을 공유한다면 조직과 교단을 넘어 협력할 수 있다. 운동 중심적 교회들은 도시를 전도하려는 비전을 가지고 (일반적으로) 조직의 모호성과 어수선함에 관용을 보이면서 외부의 사람들과 기꺼이 협력한다. 분파주의는 2차적, 3차적 신념까지 공유하지 않으면 협력하려 하지 않는다. 반대 극단은 중요한 진리(교리)를 포기하면서까지 협력을 우선으로 한다. “비겁하게 사랑 가운데 진리 말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협력하는 것도 아니고 사랑하는 것도 아니다.” (733)
(3) 상명하복 없는 자발성이 성장을 가능하게 한다. 운동 역동성이 있는 교회나 조직은 영적 자발성이 있다. 단지 위에서 내리는 지시나 명령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점화가 일어난다. 아이디어들은 비공식적인 대화 가운데서 많이 생겨나며 친밀한 관계(우정) 속에서 추진력이 더해진다. 리더들은 비전과 역할에 따라 자연스럽게 드러나며 준비된다.
교회는 조직화된 유기체로서 내부에서만이 아니라 외부에서도 운동 역동성이 나타나는데 그것이 바로 자연스러운 교회 개척이다. 사도행전에서 교회를 개척하는 것은 사역의 기본 요소(교육, 전도, 교제, 제자도, 예배 같은 요소)였으며 꾸준히 그리고 정상적으로 일어났다. 교회 개척은 건강한 교회의 자연스럽고 습관적인 일이다. 사도행전(특별히 14장)에서 사도바울은 교회를 개척하는 단계로서 복음을 전하고, 공동체를 세우고(북돋고 격려), 리더십을 개발했다(장로를 세움).
선구자에 의한 교회 개척 | 교회에 의한 교회 개척 |
---|---|
목회자-지도자들이 보통 스스로 시작한다. | 교회 지도자들이 회중에 의해 선택되기도 하나, 교회가 불러서 파송하기도 한다. |
핵심 멤버 없이 시작한다. 선구자가 사람들과의 연결 및 전도를 통해 핵심 멤버를 얻는다. | 멤버들이 ① 셀 그룹들을 묶어 주는 것과 ② 멀리 사는 교인들을 파송함으로써 형성된다. |
재정은 ① 선교기관, ② 친구들과 교회들을 통한 개인적인 재정 모집, ③ 자비량-자영업, 또는 ④ 이들 중에 몇 가지 통로를 통해서 충당한다. | 재정은 ① 핵심 그룹의 헌신, ② 모교회의 선물-보조, ③ 멀리 있는 교회들이나 개인들의 외부 지원, 또는 ④ 이들 중에 몇 가지 통로를 통해서 충당된다. |
코치는 멀리 있는 목회자 또는 지도자이며, 가끔씩 본다. 또는 책으로 읽는 코치이다(돌아가신 분 또는 멀리 있는 분). | 근처에 있는 코치와 정기적으로 모임을 한다. 종종 동료에 의한 상호 코칭이 가능하다. |
모델은 종종 혁신적이다. 새로운 모델을 만들거나 멀리 있는 모델을 모방한다. | 모델은 모교회와 비슷하다. 물론 쌍둥이는 아니다. |
자연스러운 교회 개척 마인드가 되기 위해서는 다음 세 가지의 마음가짐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① 자신의 자원을 기꺼이 보내고 돈, 사람, 지도자들에 대한 통제권을 기꺼이 잃을 수 있어야 한다. (그와 함께 따라오는 책임도 지어야 한다.) ② 자신의 사역의 형태 자체에 대한 통제권을 어느 정도 포기해야 한다. (새로 개척되는 교회가 자신들의 목소리와 강조점을 가지도록 해야 한다.) “다른 세대와 문화는 다른 종류의 교회를 만들기 마련이다. 이것은 모 교회의 건강함을 저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증명하는 것이다.” (751) ③ 자신의 개별적 교회보다 하나님의 나라를 더 위해야 한다. (자신의 세력을 구축하는 것보다 하나님 나라의 전반적인 건강과 융성함에 더 관심을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