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정성의 원리와 평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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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향지기 댓글 0건 조회 6,023회 작성일 19-01-05 15:54본문
[불확정성의 원리와 평강]
1.우리는 현재 21C를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는 과학이라는 문명이 거대한 디딤돌 역할을 하고 있다. 하늘로 쏘아 올린 공은 반드시 떨어질 것이라는 것은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핵심 원리이다. 과학이 떨어지는 공의 원인을 밝혀주었고, 쏘아 올린 모든 공은 예외 없이 모두 떨어지므로 과학의 진정성을 증명해 주었다. 만약 쏘아 올린 공이 떨어지지 않고 있다면 우리는 불안을 느끼게 된다. 그 공이 계속 하늘에 머무를지, 아니면 내 머리에 떨어지지는 않을지, 혹시 내 아이가 떨어지는 공에 다치지는 않을지 걱정하는 마음은 과학의 세계로 들어가서 왜 떨어지지 않고 있는지를 규명해 주어야 맘이 편하다. 더 나아가 그 공이 언제, 어디로 떨어질지를 예측해 주어야만 삶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2.내 마음에 평강을 찾아주는 과학은 결정론적 사고관을 가지고 있다. 태양은 반드시 아침에 뜨고 저녁에 진다. 만약 낮이 너무 짧아서 누군가가 신적인 권능을 가지고 태양을 기브온 위에 잡아둔다면, 혹은 밤이 오지 말라고 달을 아얄론 골짜기에 가둬둔다면 사람들은 극도의 불안감에 빠져 들게 될 것이고, 세상은 종말을 보여주듯 대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다. 일식과 월식이 일어나도 불안하지 않을 수 있는 것도 과학이 준 위대한 평강이다.
3.우리가 디디고 살아가는 이 땅은 안전할 것이라고 믿어야 평강이 임한다. 하지만 뜬금없이 싱크홀이 생기면서 어느 순간 내가 서 있는 이 땅이 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 그 평강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만다. 우리는 과학자들이 땅꺼짐 현상의 원인을 밝혀내고, 땅꺼짐 위험 지도를 완성해 내고서야 비로소 후들거리는 다리를 곧게 펴게 된다.
4.인류는 세기말이 되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시한부 종말론 때문에 홍역을 앓아왔다. 몇 년 전에는 전쟁설이 등장하여 한반도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이런 종말론과 전쟁설 때문에 평강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과학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인류 역사는 신앙인의 말보다 과학자의 말이 더 옳은 것임을 증명해 주었다. 하나님이 용한 목사님을 통해 5년 후 종말이 임할 것이라고 예언한다면 평강을 잃어버릴 사람들은 지옥에 갈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특심’이어서 천국의 상석을 예약한 사람들이다. 지옥에 갈 사람들은 과학자들이 그려주는 장밋빛 미래에 젖어 그 날을 설레며 기다리고 있다.
5.그러나 이런 과학의 세계에 복병이 숨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미시적 세계에 있던 양자역학이었다. 원자 주위의 전자들의 세계가 입자인가 파동인가를 두고 고민하다 밝혀진 불확정성의 원리이다. 움직이는 물체의 위치와 속도는 동시에 규명될 수 없다는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워낙 어려운 내용인지라 자세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슈뢰딩거의 고양이로 더 잘 알려진 불확정성의 원리는 우리의 미래가 결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 과학의 산물이다.
6.매일 아침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아침식사를 하던 사람에게 ‘당신은 내일도 아침을 드시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 일이 100%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 없다. 그저 확률적으로 아침을 먹게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일 뿐, 반드시 먹는다고는 할 수 없다. 사람은 이상하게 누군가가 이런 말을 하면 보란 듯이 아침을 굶기도 하겠지만, 그 사람이 사고로 저녁에 죽거나 다칠 수도 있기 때문에 장담할 수는 없는 것이다.
7.과학의 불확정성의 원리 덕분에 이 시대가 과학의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종교가 버젓이 살아 숨 쉴 수 있게 만드는 틈을 내 주었다. 물론 그 작은 틈새 사이로 보험도 생존하여 번성할 수 있게 했다. 뿐만 아니라 ‘일체유심조-모든 것은 마음 먹기에 달려있다.’와 같은 원효철학도 가능케 했다.
8.톰 크루즈 주연의 ‘마이너리티 리포트’라는 영화는 ‘미래가 예측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거대담론을 담아내었다. 사람의 행동양식을 통해 살인을 예측하고 미리 사전에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영화 속 살인범들은 살인을 할 뻔한 사람들이지 실제 살인을 한 사람들은 아니다. 이런 살인을 할 뻔했던 사람들을 살인 직전에 잡아서 살인범으로 취급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영화 속 톰 크루즈는 과학적 사고관인 ‘결정론적 사고관’의 맹신자였다. 하지만 영화는 결론에 다다르자 살인예측 시스템의 붕괴로 결정론적 사고관에 문제가 있음을 암시한다.
9.우리의 미래는 확률적으로 예측할 뿐이지, 결코 결정되어 있지는 않다. 과학과 같은 결정론적 사고관에 불확정성의 원리를 제시한 양자역학이 있듯이 인간에게도 ‘의지’라는 또 하나의 축이 있어서 미래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의지’라는 놈은 결과를 분명하게 만들지 못해서 ‘진인사대천명’, 즉 최선을 다하지만 결과는 하늘에 맡기게 되었다. 여기에 나오는 ‘하늘’이 불교에서은 ‘인연’이고, 기독교에서는 ‘주님의 뜻’이 담당하고 있다. 결국 미래는 ‘의지’에 ‘하늘’이 합쳐서 만들어 내는 불확정성의 원리가 지배하는 세계인 것이다.
10.인간의 평강은 어디에서 올까? 가장 기본적인 평강은 물리학에 기초한 세계에 있다. 여름에 눈이 오면 안 되고, 겨울이 더우면 안 된다. 낮은 환해야 하고, 밤은 캄캄해야 한다. 물은 0도에서 얼고 100도에서 끓어야 한다. 자동차의 악셀레이터를 밟으면 차가 나가고, 브레이크를 밟으면 서야만 평강이 생기는 법이다.
11.인간의 평강은 물리학적인 평강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낙관적인 세계관이 또 한 부분을 채워줘야 한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고 믿을 수 있을 때 밤의 잠이 달콤한 법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열심히 공부해 봐야 아무 소용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보다, 인내는 쓰고 결과는 달다고 믿는 사람이 평강을 누린다.
12.낙관적인 세계관이 항상 맞는 것은 아니라서 간혹 평강의 배신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다. 긍정의 힘이 항상 옳은 것이 아니고, 최선을 다한다고 해서 항상 좋은 결과가 뒤따르는 것도 아니라서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의 저자 스티븐 코비는 사업에 실패했고,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를 쓴 존 그레이는 이혼했다. 자기계발서 100권 읽고도 실패할 수 있다는 말이다.
13.낙관적인 세계관이 불확정성의 원리에 갇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서도 뿌리 깊게 내려있다. 그것도 결정론적 사고관으로 위장해서 말이다. ‘예수 믿으면 부자된다.’, ‘기도하는 사람은 망하지 않는다.’,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킨다.’, ‘십일조하면 복 받는다.’와 같은 것들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 가난하게 된 예를 알고 있다. 운전하기 전에 항상 기도하시던 분이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것도 봤다. 십일조 열심히 하는 교인들이 그렇지 않는 교인들보다 반드시 더 잘 살지는 않는다. 기독교 신앙은 철저하게 불확정성의 원리에 갇혀있다.
14.물론 기독교 신앙 안에 결정론적 사고관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와 같이 분명하고도 확고한 절대진리가 존재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땅을 딛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죽음 이후의 문제가 현재의 평강을 담보해 주지 않는다. 죽어가는 사람에게는 평강을 주겠지만 당장 오늘 먹을 것을 걱정하는 사람에게는 별로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15.과학의 세계에도 불확정성의 원리가 있듯, 신앙의 세계에도 불확정성의 원리가 있는 셈이다. 여기에 불안이 깃들고, 낭패와 실망을 겪게 만든다. 하지만 과학의 세계에서 지동설이 진리이듯, 신앙의 세계에서도 분명하고도 확고한 결정론적 진리가 하나 있으니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언제든지 나를 사랑하신다.’라는 사실이다. 우리의 평강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에 기인한다.
16.불확정성의 원리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그 사랑~ 변함 없으신~ 거짓 없으신 성실하신 그 사랑~’을 믿을 때 ‘세상이 줄 수 없고 알 수도 없는 평안’이 깃들게 된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지 않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오늘처럼 내일도 나를 사랑하신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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